구녁*

뻐꾸기 울음소리 초여름 밤이 깊었다. 무심코 여는 문소리에 날아가 다시 앉는다. 멀어진 구슬픔에 귀를 더 길게 열어보는.   멀리서라도 실컷 울어라. 어미는 이국의 사생아였으니, 구석자리 거미줄이며...

꿈틀꿈틀한 문장

우리 선생님은 지렁이를 사랑합니다. 길게 길게 숨을 아껴가며, 몸통도 끊지 말고, 느릿느릿해도 좋으니 살아있는 지렁이를 쓰라고 합니다. 비 오는 날 텃밭에서 지렁이를 자주 봅니다....

화분

생체의 창이 열린다사향제비나비 밖으로 밖으로생물들 발정에 분주하다 흙살 가둔 터속 단장 한창이다햇살 꼬이는 씨방을 갖기 위한 자리다툼모여든 꽃나이, 홍등 빛 바람을 기다린다 우주를 향하는 땅속 깜깜한 자궁로켓에 얹힌 꽃씨 한 움큼어둠 속으로 흩어진다채홍사의 수작으로거룩한 모성에 안기듯 틈새로 틈새로웜홀*의 난해한 지형을 헤쳐 나와 다독여 묶이는 방태초의 고독이 태교의 하모니에 심장을 박동하며우주를 유영하는 발차기 한창이다아기집에 갇힌 계절은 한껏 부풀고몸 트림이 지축을 가른다손발 뿌리 내리는울음 안에서 일어서는 울음 우렁차다진화를 잊은 유전 형질들어미 허물을 뒤집어쓴다 생의 보금자리에서 블랙홀을 오가는꽃이 씨앗을 씨앗이 꽃을 낳는윤회를 키우는 우주불꽃 번식이 환하다 계간 <한국동서문학> 2017년 겨울호 * 웜홀 (Worm Hole) :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연결된 우주 내의 통로, 시 공간의 다른 지점을 연결하는 고차원의 통로  송운석 (시동인 캥거루 회원·2017 년 한국동서문학 신인작품상 수상·2016년 제18회 재외동포문학상 시 부문 입상)

우는 신발

- 진학 형에게  하늘은 울 일이 없어 이 땅에 울다 가는 거다다 울고 오라는 세상얼굴 내밀며 울지 않으면 엉덩이를 맞는 거야울러 왔다는 거 잊지 말라고그래서 피카소도 열심히 그린 우는 여인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신발을 본 적이 있지하늘에 줄 하나 걸어놓고세상을 내려다보며떠나는 맨발을 올려다보며울고 있는 가지런하고 어여쁜 구두를 보았지울지 않으면 미치고 만다고우는 아이들이 모여 평화스러운 골목팀 스프리트 바람이 한참이던 양평의 들판선아였던가 2월의 외딴 집열다섯 소녀의 몸속으로 밀고 들어온 검은 구름그때 울 수 있었으면바람은 지나가는 거라고 수근 거리는 사람들 앞에서쉬쉬거리는 힘없는 아비를 붙들고 울었더라면그 뜨거운 맨발이눈발 가득한 들길을 피해 갔을까 태어나는 것은 모두 아프다고풍진 세상이 안타까워 예수도 그렇게 울었던 것을얼굴을 내밀며 울지 않는 아이그래서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거야신발 하나 가지런히 놓이기까지세상은 아픈 거니까어서 울라고울어야 견디는 거라고  김 오 (시인·시동인 캥거루 회원) 

대티고개

- 선애에게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고갯길에소나무가 많았지대티를 재첩이라고 불렀다뒤축이 벗겨져도쉴 틈이 없이,재첩국 동이를 이고넘어가는 아지매들돌아보니차오르던 상현달 아래였다 망초나 달개비로 살자너 모르게 고개를 꺾던 열일곱달리는 기차처럼 앞만 보고...

빛나는 조끼

늦겨울 새벽 환승역 스트라스필드기차를 타러 나오는 일용직 근로자들형광색 안전 조끼가 움찔거린다 새벽새 울음보다먼저 일어나허리 구부리고자신을 해체시켜쐐기가 되는 이들 소리 없이 자신을 빈 틈에 밀어 넣고살갗처럼 벗지도...

잿빛 하늘

하버 브리지를 건너는데 어느 해 가을의 철탑이 떠오른 건, 잿빛 하늘 때문이었을 것이다. 30여 년 전 이즈음, 나는 인천 용동 마루턱에 있는 아치형 철탑에...

럭키의 봄

둘둘 싼 포대기 속번개가 튄다 문이 열리자쏟아지는 시궁창 냄새목구멍 깊이 송곳니 날서는저 문밖어디를 지나왔는지 세상을 물어뜯다 자신을 물어뜯은검은 목구멍에 솟구치는 송곳니 “안락사 시켜야 돼요” 오물로 던져 놓은 숨...

호투 잠자리

할로겐 램프의 강렬한 빛을 받으며 날개를 핀 크리스털 조각은 분명 호투 잠자리였다.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펴진 투명한 네 개의 날개 속으로 마치 잎맥처럼 상감처리 된...

거울 앞에서

거울은 나를 보고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본다 지나 온 길에 살며시 검버섯이 피고이마의 주름은 유년의 골목만큼 깊다세포 하나 하나가 늙은 시간을 수 놓은 얼굴반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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