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어머니

일렁이는 바다 위로 하얀 조개껍질을 펼쳐 놓은 듯한 예쁜 오페라하우스가 어머니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 죽으면 비상금은 동생에게 주고 은행 잔금은 네 것으로 해라! 유언장에 다 적어 놓았다… 이번에 온 김에 콩고드병원에서 죽으면 참 좋겠는데… 얼마나 더 살려고 이러는지….”

긴 한숨을 힘들게 내려놓으시는 어머니의 앙상한 어깨 위로 따뜻한 햇빛이 내려앉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출출 하시죠?” 하며 두 줄 김밥을 개봉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관광객마저 끊어진 맥콰리체어의 포토존엔 실 같은 적막감만 흐르고 있었다.

 

몇 달 전, 어머니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고 계신 어머니.

“몰라! 그냥 눈물이 나…” 하며 힘없이 고개를 들어 하얗게 바라 보셨었다.

어머니 나이 91, 내 나이 71,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온갖 감언이설로 달래드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아범! 할 말이 있는데… 나 정말 양로원에 보내줘!”

서글픈 눈망울 깊은 곳엔, 외로움과 그리움이 흐르고 있었다.

 

8남매의 장녀인 어머니는 20대 초부터 여장부 가장이셨다.

정읍, 광주, 전주에서 보따리상, 미싱공으로 젊은 시절을 소처럼 일했다.

서울 흑석동에 방 3개 140만환짜리 한옥을 구입하기 석 달 전, 4.19로 인하여 계주인 이모가 파산하면서 갑자기 빈손이 되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 후 이모 집 주변을 맴돌다, 서울 생활이 뜬금없이 시작됐다.

길거리 구직으로 식모, 미싱공, 식당주방 등 일을 하며 또 다시 피 같은 돈을 모았다.

결국 가까스로 동네의 국밥집을 꾸려가게 되었다.

비좁았지만 가족이 함께 할 공간이 만들어졌다.

다락방이 생겼을 땐 아들을, 쪽방이 생겼을 땐 딸을 친정서 불러왔다.

삼촌들과 이모도 어머니를 통해 서울 살이가 시작됐다.

온 가족을 부둥켜안고 셀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며 연탄가스와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다.

가족의 고달픈 삶을 가냘픈 몸으로 온전히 떠안으신 어머니였다.

 

내가 국비 직업훈련 교사과정을 졸업한 후 기능사 2급을 가지고 주물공장에 첫 취업한 어느 날 밤.

화상 입은 아들의 거친 손 그리고 속 팬티까지 검게 변한 걸 보시고 어머니는 “집 대신 죽을 쒀 먹더라도 대학을 꼭 보냈어야 했는데…” 하며 흐느껴 우셨다.

좁지만 삶의 전부였던 엄마의 집에서 나는 이를 악물어야 했었다.

3년 후 공채 1기로 교직을 시작했고 야간 고졸 10년 만에 야간대학을 들어갔으며 23년 만에 한 분야 국가기술자격증을 통일했다.

그 후 IMF로 시작된 20년 호주이민 또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좌절을 극복하는 어머니의 험난한 고생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머니의 결실이었다.

 

살점 하나 없는 어머니의 메마른 팔이 겁이나, 차마 몸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음에 하루하루가 가엾고 죄송스러운 마음뿐이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일생을 우리에게 모두 걸었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걸었던가!

허리와 어깨가 앞으로 구부러진 상태로 뒤뚱뒤뚱 위태하게 걸으시는 어머니.

거실이 타일바닥이라 넘어지거나 주저앉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은 불안감에 하루하루가 가고 있다.

 

어머니의 우울증 진단으로 전문의 치료를 시작했다.

나도 넌지시 함께 예약을 했다.

“어머니! 우울증도 감기 같은 거래요… 저도 치료에 함께 할 거예요.”

 

병원을 나서며 어린 아이같이 환히 웃으시는 어머니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하다.

어머니 손은 언제 잡아도 늘 따뜻하다.

살점이 있으나 살점이 없으나….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전직 버스운전사)

 

 

 

Previous article일용직근로자의 정규직 전환과 CEIS
Next article존중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