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해가 간다

해가 간다. 이민 와서 팔팔할 때, 우연히 알게 된 열명 남짓한 녀석들이 사칠이사팔이 (1947, 1948년생)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어 이따금 돼지갈비나 육개장 잘하는 교민식당에 모여 소주를 거푸 마시곤 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안면을 트고 힘든 이민살이에 서로 의지했던 또래들은 연말이면 으레 모여 송년회라고 잔을 부딪혔다.

말이 송년회이지 넋두리 한마당이었다. 한 놈같이 고국에 있을 때는 잘나갔다는 얘기들뿐이었다. 고국에 있을 때 별볼일 없는 놈은 한 놈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뻥까지 마라, 새끼야!”라는 꼭지가 돈 놈이 참견해서 모두 낄낄대면서 술 한잔씩 더 마시곤 했다. 송년회자리가 끝날 때면 너나 나나 휘청댔다.

60줄에 들어서자 사칠이사팔이 놈들이 하나 둘 안보이기 시작했다. 허긴 어린 시절 깨복쟁이 동네 친구도 아니고, 학교 동창도 아니고, 이민 와서 어쩌다 만난 사이니 떠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그다지 가슴 쓰린 일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이 아름다웠다. 떠날 때를 모르고 비비적대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다. 알아서 때맞춰 조용히 물러나는 것은 샘 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처신이다. 그렇게 소식 끊긴 사칠이사팔이 놈들은, 정신 나간 한 두 놈 제외하고는, 교민사회에 나대지 않고 평온하고 한적한 노후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 70넘고보니 송구영신한다는 송년회자리는 먼 옛날 얘기가 돼버렸다.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소식에 의하면, 한 시절 음흉한 속셈으로 교민사회에 얼굴 들이대고 자칭 교민사회 리더라고 으쓱대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사라졌거나, 파산했거나, 병들었다고 한다. 그런걸 보면 알아서 잠잠해진 사칠이사팔이 놈들은 분수도 알고, 나서야 할 때와 들어가야 할 때를 스스로 아는 괜찮은 놈들이었던 모양이다.

세상이 빠르고 눈부시게 진보한다는 말은 이젠 듣기에도 진부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갈망하는 물결은 힘차고 거세다. 나이든 세대들에게도 변화된 사고와 개념과 정서가 요구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각 분야의 제반 환경은 어제 오늘이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몇 개월 전에 내가 사는 동네 ‘한인회’라는 곳에서 회장선거를 한다고 했다. 나이깨나 든 여인네 하고 비교적 싱싱한 남정네가 회장 후보로 나섰다. 항시 한인회를 기웃대는 인물들이었다. 어쨌거나,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다람쥐쳇바퀴 도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교민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명제와, 방향과, 어젠다가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변화되었기를 기대했다.

헌데, 후보와 함께한다는 스태프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나는 기대를 접었다. 자기들끼리 ‘교민사회를 이끌어간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변화할 줄 모르는 완장프레임에 갇힌 인물들이 주축이었다. 특별히 하는 일없이 수 삼 년을 한인회주변을 맴도는 인물들이었다.

심지어 무슨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이라고 등장한 중심인물들도 케케묵은 아날로그시대에 찌든, 아직도 자기가 교민사회의 중심인 것으로 착각하고 허세 부리는 인물들이었다. 이게 제대로 굴러가겠나 싶었다. 역시나 지저분한 뒷말이 무성했다.

자신만이 뛰어나다는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음험하고 엉뚱한 착각에 빠져있는 인간들은, 우리의 만남이었던 옛 사칠이사팔이들처럼 알아서 물러나 있는 것이 새롭게 변화 진보하는 후세대에게 그나마 얼굴이 좀 서는 걸 거다.

한 해가 간다. 사람들은 새해가 오면 뭔가 새로운 시작을 바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있는 새해 풍경들은 그게 그거고, 그 인물이 그 인물이고, 그 흐름이 그 흐름이다. 그것이 실체다. 그렇지만, 머잖아 ‘어, 뭐야? 언제 이렇게 변했어?’라는 탄성이 나올 날이 기어코 있을 거다. 나는 거기에 발 담그고 싶다.

해마다 해가 간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젠 제발 송구 (送舊)와 더불어 영신 (迎新)이 보이는 새해가 오면 좋겠다. 무언가 시작되려면 다른 무언가가 끝나야만 한다고 했다. 새롭게 시작되지 않으면 새로워지지 않는 거다.

 

*글 제목은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서 퍼왔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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