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반백 여 년을 함께 살아온 당신에게 처음으로 글을 씁니다. 당신은 세상의 평범한 아내들과는 달리 남편이 쓰는 글을 잘 읽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어디에선가 읽을 수도 있다는 바램 때문에 이 글쓰기가 조금은 쑥스럽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 있는 숫기가 없어 관성처럼 함께 살아온 세월을 더듬으면서 이렇게 글로라도 당신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당신과 나는 기억나지 않은 오래 전부터 평소에도 서로에게 존대어를 사용하므로 존대어로 글을 쓰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가끔은 “야! 이은희!”라고 부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안 되는 건 오랜 습관과 부부는 세월을 먹을수록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나만의 신념 때문일 겁니다. 부끄러운 황혼이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해지는 서글픈 세상에서 당신과 내가 48년이 넘는 세월을 변함없이 함께 있는 것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오랜 세월 습관처럼 쌓여온 상대방에 대한 아낌과 배려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산소 같은 여자’라는 광고문구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문구를 산소처럼 신선하고 상큼한 여자가 아니라 산소가 없으면 죽어야 하듯, 생명을 부어주고 지켜주는 여자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당신이 바로 산소 같은 여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있음이 그 증거인 겁니다.

2014년에 고국에서 상영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집 앞으로 거울처럼 맑은 좁다란 강이 흐르는 강원도 횡성의 조그맣고 아담한 마을에 살고 있는 노부부의 실제의 일상을 그리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89세가 되어서도 소녀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강계열’ 할머니와 로맨티스트의 달콤함이 넘쳐나는 98세된 ‘조병만’ 할아버지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딜 가든 고운 빛깔의 ‘커플 한복’을 챙겨 입고 두 손을 꼭 잡고 다니죠.

봄에는 붉고 노란 예쁜 꽃을 꺾어 백발이 된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면서 서로가 예쁘다고 손뼉을 칩니다. 여름엔 개울가에 앉아서 빨래하는 할머니 앞에 할아버지는 개구쟁이 같은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작은 돌멩이를 퐁당 던지며 물방울을 튕기는 장난을 하고, 할머니는 얼굴에 뛰어오른 물기를 닦으면서 행복해합니다. 가을엔 마당 가에 쌓인 낙엽을 서로에게 뿌리며 장난을 치고,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면서 즐거워하며 철부지 아이들이 만드는 것 같은 엉성한 모습의 눈사람도 만듭니다.

백발의 노부부의 일상은 그렇게 매일이 신혼 같습니다. 장성한 자녀들 모두 도시로 떠나 보내고 둘이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는 기침을 심하게 하며 점점 기력이 쇠약해집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며 더 잦아지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던 할머니는 머지않아 다가올 이별을 예감하고 준비를 합니다. 할아버지가 밤새 기침에 시달리는 날이 많아지자 할머니는 집 앞의 강가에 쓸쓸히 앉아 말없이 강물을 바라보며 할아버지가 자신을 홀로 두고 저 강을 먼저 건너지 말아달라고 마음 속으로 애원합니다.

할머니의 애원도 소용없이 끝내 할아버지는 그 강을 건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입다 남겨둔 옷들을 태우며 흐느낍니다. 76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는 그렇게 서로의 손을 놓고 이별을 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부부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이별해야 하는지를 사람들의 가슴에 화인처럼 새겨준 겁니다. 부부란 서로의 단점에 대해 불평하기보다 장점에 대해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습관처럼 쌓이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했습니다.

김광석이라는 고인이 된 가수가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가 있습디다. 그 노래가 가슴을 후비더이다. 곱고 희던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얘기, 자식들 키우면서 가슴 졸이던 얘기, 세월이 흘러 황혼에 기우는 얘기가 어쩌면 당신과 나의 얘기 같다는 생각도 들더이다.

노래 배경으로 깔리는 노부부가 석양을 바라보며 손잡고 느리게 걷는 뒷모습이 나를 울리더이다. 유난히 굴곡진 나의 삶을 말없이 따르며,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도 하면서 인생의 슬픔, 기쁨, 아픔, 즐거움을 함께 나눈 당신의 그을린 시간들이 내 육신을 저리게 하더이다. 나도 당신의 손을 잡고 노을 진 들녘을 걷고 싶소이다.

다시 새날이 시작됩니다. 이제 당신과 내가 부부 된 지 49년이 됩니다. 당신과 함께 있어 평온합니다. 행복 가득하고 건강한 새해 맞이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Previous article족발 권력
Next article코리아타운 특별기획 : ‘검은 호랑이의 해’ 임인년 (壬寅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