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 권력

흑갈색 종아리에 윤기가 넘쳐흐른다. 근육질 허벅지나 질 좋은 머리와도 견줄 수 없는 발목과 무릎 사이의 존재감이라니. 뼈를 튕겨내면서 툭 벌어진 모습은 오랜 시간 뜨겁게 공들인 흔적이다. 열과 성이 더해져 제대로 부활한 족발은 지금 시드니 한식당 진열대 위에서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바탕 김이 빠져나갔는지 살갗이 벌써 탱탱해 보인다. 서너 시간 후면 제대로 쫄깃해지겠다.

 

내가 식은 족발의 쫄깃한 맛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학부 시절, 민속학자 K 교수는 억지로 먹게 된 어떤 혐오 음식에 대한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이 절묘한 맛을 왜 이제야 알았는지 후회된다던 교수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탄력 떨어진 50이 되어서야 콜라겐 덩어리인 족발의 귀한 맛을 알게 된 내 후회하고 비슷할지 모르겠다.

 

발이 잘린 다리를 족발이라 부르려니 진짜 족에게 눈치가 보인다. 보통 돼지 족이라 하면 발가락을 포함한 다리 전체인 장족을 말한다. 그런데 시드니에서 본 족발은 대부분 발이 없었다. 어릴 적 처음 보았던 족발은 빠져나간 채 발가락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어 가히 엽기적이었다. 맛을 보기도 전에 혐오식품이 되어 버린 이유였다. 그런 족발과의 좋지 않은 인연은 결혼 후 변화가 생긴다.

 

첫애를 낳은 후 젖이 돌지 않아 고생할 때였다. 시어머니는 젖이 돌게 하는데 특효라며 족발을 해오셨다. 엄마라는 역할은 평생 굳어진 식성까지 바꿀 정도로 강했다. 용기를 내어 살만 골라 먹으니 먹을 만했다. 선입견이 있던 돼지 냄새도 나지 않았고, 식감도 나쁘지 않았다. 잘 먹었다는 인사에 시어머니는 수시로 해 보냈다. 족은 한두 개 삶으면 맛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번에 여러 개가 배달되었다. 친정 식구와 이웃들과 나누어도 충분했다. 주변에 퍼져나간 ‘시어머니 표’ 족발은 인기가 많았다. 중독처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다른 족발 맛을 모르던 나는 그 맛이 원래 맛이려니 했다. 나중에 다른 족발을 먹어보고 나서야 이 맛이 아주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아이는 유난히 족발을 좋아했다. 겨우 걷는 애가 살이 발라진 뼈를 뜯으며 한참을 놀았다. 좀 더 자라서는 제법 그 맛을 즐기기까지 했다. 시어머니는 족발이라는 음식으로 당신의 존재감을 3대에 걸쳐 확실하게 인식시킨 셈이었다. 손주가 할머니 족발이 최고라며 기다리는데 이만하면 가족 간에 누릴 수 있는 꽤 괜찮은 애정의 권력 도구였다. 그랬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당신들만의 음식 맛으로 당신들만의 자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만의 음식 맛으로 아내와 엄마로서 가족 사이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호주로 이주 후에도 아들아이는 자주 족발을 찾았다. 그때만 해도 시드니에 한국 음식점이 많지 않을 때였다. 더구나 족발을 하는 식당은 찾기 어려웠다. 여러 군데 수소문한 끝에 나는 아들아이의 입에 자랑스레 족발을 넣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들아이의 낯빛에 실망이 역력했다. “엄마, 이 맛이 아니에요. 할머니가 해준 맛하곤 달라요.” 아들아이의 입맛은 정확했다. 겉보기에는 똑같은데 뭔가 밍밍했다. 역시 할머니의 존재감은 족발 끝에서 진하게 살아 있었다.

 

얼마 후, 시어머니가 시드니를 방문했다. 두어 달 계시기로 했다. 유난히 깔끔하고 살림 잘하는 시어머니와 짧지 않은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나는 시어머니의 음식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도착하시기 전에 당신 아들과 손주가 먹고 싶어 하는 ‘시어머니 표’ 음식 목록을 냉장고에 커다랗게 붙여 놓았다.

 

족발, 보양탕, 호박고지 들깨탕, 비지찌개, 팥칼국수, 보쌈, 겉절이, 돼지갈비, 영양 찰밥 ….

 

족발이 단연 첫 번째 목록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물었지만 다듬는 과정이 어렵다고 가르쳐 주지 않던 음식이었다. 바로 정육점으로 갔다. 시어머니는 다리 부분만 깨끗하게 손질된 생족발을 보시더니 쉽게 할 수 있겠다며 제대로 된 시연에 들어갔다. 털을 면도하고 발가락 사이를 깨끗이 씻어내는 수고는 생략되었다. 먼저 족을 찬물에 담가 피를 뺐다. 서너 시간 후 물을 갈아낸 후 애벌 삶기를 한 다음 다시 찬물에 씻어내고는 간장과 함께 온갖 한방 재료를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 정도 지난 후 건져내어 소쿠리에 바치자 저절로 뼈가 발라졌다.

 

드디어 시드니에서 고향 맛이 듬뿍 밴 족발이 탄생했다. 명문 족발집에서나 전승한다는 씨앗 양념간장을 남겨 냉동고에 보관했다. 그 후로 나는 ‘족발 삶는 여자’가 되었다. 뼈를 발라내고 랩에 싸서 예쁘게 모양 잡은 족발은 선물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가족처럼 지내던 지인은 뒤뜰에 야외용 가스통을 설치해주고 커다란 들통까지 사주면서 내게 족발을 요구했다. 그즈음 나는 열심히 족발을 삶으면서 지인들과의 관계도 쫄깃하게 다져 나갔다. ‘겉보기와는 다르다’느니 ‘어쩜 이런 것까지 잘하느냐’는 등의 말에 으쓱해져서 더 열심히 춤을 추었던 것 같다. 그러나 춤추는 고래도 한때라고 몇 년 지나자 점차 시들해지더니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권력이란 것은 제때 이양해야 탈이 없다. 나를 제일 귀찮게 하던 지인에게 고이 모셔두었던 씨앗 양념과 들통을 넘기고,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을 고스란히 전수했다. 당연히 그쪽으로 지인들이 꼬이고 나의 족발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는 내가 역수입하듯 가끔 얻어먹는 형편이 되었다. 이렇게 얻어먹는 족발 맛이 어찌나 귀하던지 살만 파먹던 내가 껍질의 맛까지 알게 된 것이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 모유 수유를 한다고 해서 기특했다. 뭔가 칭찬해 주고 싶어 오랜만에 족발을 삶으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식성을 아는 터라 공연히 해서 보냈다가 시집살이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한편으론 아들 먹이고 싶은 속마음도 컸었기에 아쉬움이 가시질 않는다. 아내를 배려하느라 먹고 싶은 것을 조심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배웠으면 좋겠지만 요즘 세상에 감히 어불성설이다.

 

궁리 끝에 나는 야심 찬 방법을 모색한다. 손주가 크면 가끔 불러 몰래몰래 족발이며 보양탕*이며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된 맛을 알려주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이야말로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특화된 일이 아니겠는가. 갑자기 두 부자를 사로잡을 계획에 손끝이 쫄깃해진다. 그럼 그렇지, 한번 본 권력의 맛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다.

 

*양고기로 만든 전골.

 

 

유금란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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