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누굽니까

아침을 먹던 여자가 티브이를 켰다. 텅 비어 있는 슈퍼마켓 진열대 앞에는 화장지를 사려고 공황상태에 빠진 구매자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여자는 티브이를 끄고 벌떡 일어나 농장 창고에서 트럭을 끌고 나왔다. 그날부터 화장지 구매가 여자가 사는 목적이 되어버렸다. “당신이 많이 먹고 많이 싸는 줄은 알지만…….” 남자의 농치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화장지를 사러 황망히 떠나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짧게 한 마디 뱉었다.

사람들이 움직일 땐 남보다 한 발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는 것 몰라요. 불안해요. 불안하다고요.

여자가 온종일 돌아다니며 트럭 가득 화장지를 사 들고 온 날 저녁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또 티브이를 켰다. 이번엔 강도로 돌변한 시민들이 총을 들고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화장지를 강탈하는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여자는 숟가락을 놓고 농장의 창고로 달려가 산탄총을 들고나왔다.

목장과 함께 조상 대대로 대물림 해온 총은, 딩고로부터 소와 양을 보호하던 일종의 장비나 연장 같은 것이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바람에 총은 화장지를 지키는 무기로 변신했다. 여자는 자기 전에 침대 머리맡의 산탄총을 의미심장하게 쓰다듬거나 보듬어 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틀 전 여자는 머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화장지 판매를 통제하던 경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여자가 진열대에서 마지막 24개들이 화장지를 잡는 순간, 동시에 어떤 ‘암갈색손’도 화장지를 붙들었다. 손톱이 긴 데다 낙타처럼 힘이 센 손에게 화장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쉽게 포기할 여자도 아니었다. 여자가 다시 화장지에 달려들었다.

여자와 ‘암갈색손’이 화장지를 붙들고 밀당을 하다 여자가 손에게 밀리고 말았다. 손이 화장지를 끌고 가는 것을 본 여자가 다시 비닐봉지 끝을 잡고 매달렸다. 암갈색손이 여자를 밀쳐버리고 트롤리에 화장지를 실으려는 순간, 여자가 손의 왼쪽 장딴지를 물었다. 손이 비명을 지르며 뒷발 차기로 여자를 날려버렸고, 진열대 모서리에 머리를 찧은 여자는 기절했다.

뒤늦게 화장실에서 돌아온 경찰이 생수를 들이 붙고 심폐소생술까지 한 후 여자는 깨어났다. 이틀 후 여자에게 고열과 기침 등의 증상이 시작됐다.

북극곰을 보고 짖어대는 오필리아가 오늘은 아무래도 비정상이다. 곰이 먹이를 찾아 주택가를 어슬렁거리는 티브이 화면을 보고 악을 쓴다. 사람이 오면 짖어야 할 녀석이 엉뚱한 곳에 관심을 쏟는다.

그때 휴대폰이 호들갑스럽게 진동했다. 남자가 떨어뜨린 휴대폰을 주우며 고개를 드는데 목장의 소와 양들이 집을 에둘러 점거한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안 오니까 너희들이?

오필리아가 다시 짖어댄다. 남자가 다리를 질질 끌며 대문으로 다가간다.

거 누구요? 분명 차 소리가 들렸는데!

집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충혈된 눈으로 반라(半裸)로 바닥에 누워있는, 넙데데하고 두 볼에 욕심 가득한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며 남자가 눈물을 훔친다.

저 많은 화장지를 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저것들을 보호하려고 머리맡에다 산탄총까지….

총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남자는 집안의 벽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빈틈 없이 쌓여 있는 화장지 더미를 흘겨보는데 천정이 빙그르르 돌아간다. 그는 간신히 얼굴에 고글을 덮어썼다. 그러자 갑자기 화장지가 흰밥으로 보인다.

차라리 저 화장지가 모두 밥이라면. 아니지, 절반은 밥, 절반은 화장지라면! 먹고…… 뒤를 닦고.

남자는 힘없이 시선을 반라(半裸)에 돌린다. 그러고선 숟가락 뒷등을 닮은 볼록한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얇은 입술을 위로 당기며 여자와 밥을 먹었던 지난 세월을 푸기 시작한다.

여자와 남자는 각각 쉰일곱 쉰다섯, 소와 양을 키우며 삼십 년을 부부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아내 이야기를 하라면 어떡한담? 가슴이 덜컥, 접질린다. 나는 아내의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모르는가? 가령 아내는 소나 양은 좋아했지만 개는 싫어했다. 아무리 어릴 때 개한테 물렸기 때문이라지만 오필리아까지….

남자는 휴대폰을 턱과 어깨로 고정하고 전신보호복의 허리끈을 바짝 졸라맨다. 고글도 고쳐 쓴다. 컴퓨터 줌의 밝기와 볼륨을 조절하는데 고무장갑 낀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내리 미끄러진다. 가까스로 여자의 전신을 줌에 꽉 차게 넣는다.

사람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아내의 소문이 퍼지자 주변 목장들은 문을 닫아걸었다. 여자의 발가락이 잘려 나간 것을 발견한 남자는 화면을 조절한다.

자신의 생에 관해서라면 병적일 정도로 집착이 강했던 여자는, 비가 없다는 일기예보에도 *쿠카바라처럼 되바라지게 웃었다. 앙도라진 태도 하며, 남을 비웃는 듯한 표정 하며, 마치 싸우는 것처럼 들리는 체스판처럼 각진 영어 하며, 문득 남자는 갑자기 물속처럼 적요(寂寥)한 현재가 믿어지지 않아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남자는, 친절이야말로 조용히 살기 위한 가장 편안한 방법이라 믿었다. 가능한 코알라처럼 멍청하고 조랑말처럼 순해 빠진 표정으로, 시시풍덩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여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다.

초췌한 남자는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시선을 다시 반라(半裸)에 고정한다. 땅딸막한 체구, 올망한 눈, 방바닥에 눌린 몽땅한 장딴지에 알통이 탱탱하다. 무슨 일에나 빨리빨리 라고 외쳐대는 여자의 뒤를 따라 걷다 보면, 장딴지에서 꿩 알 같은 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 남자는 두 손에 힘을 잔뜩 준 자세로 여자의 뒤에서 걸었다.

오필리아가 짖는다.

거 누구요? 대문 두드리는 소리….

남자는 대문 쪽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리다 입을 닫아버린다.

쓰러질 것 같은 남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곧장 메시지 모드로 넘어갔지만, 다시 걸고, 다시 걸다 포기하고,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버린다.

너무들 하십니다. 코로나 메뉴얼에 맞추려면… 15분도 채 안 남았어요. 아무리 감염 공포증에 심리가 마비되어도 그렇지요.

넋두리를 늘어놓던 남자가 표정을 바꾸더니 반라(半裸)에 나프탈렌을 뿌리기 시작한다. 손은 작업하면서 청각신경은 여전히 대문과 현관과 전화기에 매여 있다. 밖에서 울어대는 짐승들 소리에 흠칫 흠칫 놀라며 남자는 빠르게 손을 놀린다.

그런데… 그들이 곧 올 거야. 온다고! 그들도 인간인데, 올 거야!

 

증상이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여자는 바이러스에 운명을 내주었다. 남자가 살려보려고 그토록 애를 썼건만 걸쭉한 바이러스가 당뇨, 천식, 고혈압과 합세해서 여자를 앗아갔다.

어쨌든 죽음은 무서운 것이야. 우리는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함께 기뻐하며 살기 위해서 노력했었지. 부부 사이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또 무엇이 있겠어?

남자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지금처럼 사무치게 고독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화장지 더미를 노려보던 남자가 분노한 침팬지처럼 비틀비틀 걸어간다. 다짜고짜 24개들이 화장지를 높이 던졌다. 오필리아가 정확하게 점프해서 봉지를 물었다. 남자는 발로 차고, 짓밟고, 손으로 찢으며 발악을 한다.

이게 뭐야? 이것들이 뭔데, 이 망할 놈의 화장지!

남자가 던지면, 흥분한 개는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며 뛰어올라서 물고…… 순식간에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이 끊어진 듯이 누워 있던 남자가 팔꿈치를 괴며 몸을 일으키는데, 뭔가 발끝에 거치적거렸다. 화장지였다. 발목에 발찌를 걸고 있는 꼴이었다.

한동안 굵직한 발찌를 노려보던 남자가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손바닥에 소독제를 문질렀다. 거칠게 발찌를 낚아챈 다음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르고 그 끝을 잡아당긴다. 무명베처럼 길게 풀려나오는 화장지로 여자의 목부터 감기 시작한다. 오필리아가 구석에 뒹굴고 있는 고글을 물고 와서 남자를 툭 쳤다. 그 바람에 화장지가 끊어진다.

화장지를 다루는 것도 여자와 잠자리를 할 때처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 다시 침을 묻히고 풀다 찢어지고, 또 침을 묻히면서 양팔, 양다리, 배, 얼굴을 차례로 감아나간다. 엉덩이를 감다가 몇 번이나 끊어졌는지? 손가락에 침을 몇 번이나 묻혔는지? 핼쑥해진 남자가 눈사람처럼 하얀 미라가 된 여자에게 빨간 샌들을 신긴 후 얼떨결에 성호를 그었다.

보기에 따라선, 고대 이집트의 미라보다 훨씬 더 멋있잖아. 이런 신개발 수의를 입고 싶어서 빨리빨리 화장지를 사 쟀는가? 튀는 수의를 걸치고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누구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땅으로 떠나려고?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했는가? 당신이 날마다 공덕을 쌓았는데도 불행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전생에 나쁜 업을 쌓았기 때문이야! 반면 행복했다면 그것 역시 당신이 지은 과거의 선한 일 때문이지 나 때문은 아니야!

아직도 무진장 남은 화장지를 풀어서 연결하면 아내의 영혼이 있는 그곳, 테라 인코그니타에 닿을 수 있을까? 중얼거리던 남자는 아내의 유언을 떠올린다. “너무 많이 먹고 싸질렀어 이 몸뚱이라도 초목과 들짐승들에게 던져주어요.” 숨이 넘어가기 전 고열에 시달리던 여자가, 마치 자신이 코로나 환자란 걸 잊은 사람처럼 시부렁거리던 유언을 떠올린다.

화장지로 두껍게 싼 몸은 불이 잘 붙겠지만, 들짐승의 한입 먹이나 초목의 거름이 되기는커녕 구더기조차도 반가워 하지 않는데, 그곳에서나 잘해 보시오.

오필리아가 벌에 쏘인 것처럼 날뛰며 짖는다. 파리한 얼굴을 들던 남자는 기절 할 뻔했다. 한 쌍의 남녀가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를 뽐내며, 고글이나 전신보호복은 고사하고 마스크도 끼지 않는 채, 현관문 스크린도어 뒤에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당신들 누굽니까?

로봇 한 쌍이 영화에서처럼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27장)

 

* 비가 오려고 하면 요란하게 울어 일기예보를 알려준다. 또 부시맨의 알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희미하게 살해 충동이 느껴지는 발라드 (단편소설 연재) | 온라인 코리아타운테리사 리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소설가·단편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 어제 오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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