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의 이산가족 상봉

미국 입양 간 여동생 찾아낸 혈육의 정

암을 비롯한 갖가지 질병이나 여러 사고 등은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놓는다. 이민자들의 경우, 호주의 복지시스템에 익숙지 않아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거기에 언어문제까지 겹쳐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카스 (CASS)가 격주로 제공하는 본 칼럼은 뜻하지 않게 만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문복지기관의 도움으로 이를 잘 극복한 사람들과 사랑으로 이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호주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더 나아가 호주사회로의 융합을 위한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되고자 마련됐다. (편집자 주)

 

01_둘째 여동생은 미국인 카톨릭 신부에 의해 미국 입양

팻 렁 (Fat Leong) 타이치 강사의 가족은 헤어진지 60년만에 상봉했다. 2010년 80세가 된 팻 렁 강사는 카스 후아 안 그룹 (CASS Hua An Activity Group) 모임에서 들뜬 목소리로 한 여성을 소개했다. 그가 “이 사람은 60년 넘게 연락이 끊겨 못 만났던 제 둘째 여동생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움과 함께 이 가족의 재회에 큰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렁 강사가 소개한 가족이야기는 마치 영화나 소설 같다. 그날 함께 한 이들에게 렁 강사는 그들 가족에 드리운 가슴 아픈 우여곡절의 삶을 들려주었다.

1941년 팻 렁 씨는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홍콩에서 공부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Solomon Islands)에 살던 가족을 떠났다. 솔로몬 제도에는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여동생 두 명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렁 씨가 홍콩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런 혼란 가운데 솔로몬 제도에 있던 가족들에게는 충격적인 일들이 닥치고 있었다.

1942년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를 점령했고, 렁 씨의 부친은 체포되어 일본 군함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되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닥치는 것인가. 아버지가 일하시던 배가 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사망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큰 누나마저 살해 당하는 참극이 연이어 일어났다.

당시 세 살이었던 렁 씨의 둘째 여동생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프랑스 선교사 병원으로 이송된 후 미국인 카톨릭 신부에 의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간 둘째 여동생은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아직 아기였던 막내 여동생만이 친척들의 보살핌으로 전쟁의 격변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홍콩 광둥성 친척 집에 숨어 있던 렁 씨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지역 경찰대의 간부가 되었고 1950년 상황이 안정되었을 때 아내와 함께 솔로몬 제도로 돌아갔다.

 

02_커뮤니티 봉사자로 활동, 카스 원로위원회 위원으로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부모님과 큰 누나, 둘째 여동생은 없고 남겨진 유일한 그의 가족은 막내 여동생뿐이었다. 이후 그는 솔로몬 제도에서 사업을 일구었고, 지역 중국인기업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커뮤니티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1974년 은퇴 후에는 호주로 이주했다.

성공적인 사업가로서 또 커뮤니티를 위해 헌신하면서 성공적으로 살아왔지만 렁 씨의 마음 속에는 늘 사랑하는 둘째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 미국인 신부가 남긴 주소를 유일한 단서로 네 차례나 미국을 방문했지만 그 때마다 동생을 찾는데 실패했고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여동생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 2008년의 어느 날, 렁 강사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미국 행을 결심했다. 결국 그의 끈질긴 집념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일까. 드디어 둘째 여동생을 찾게 되었다.

그 해에 둘째 여동생은 오빠와 막내를 만나기 위해 호주를 방문했고 마침내 60년만에 세 남매 가족상봉이 이뤄질 수 있었다. 렁 강사와 막내 여동생에게, 남은 혈육인 둘째 여동생과의 만남이 갖는 의미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이었다.

렁 강사는 호주로 이주한 이후에도 커뮤니티 봉사자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해왔다. 1987년부터 그는 맑은 날씨나 궂은 날씨 속에서도 허스트빌공원에서 타이 치 (Tai Chi)를 무료로 가르쳤다.

1996년부터는 카스의 초대로 허스트빌에 있는 ‘후아 캉 (Hua Kang) 그룹’ 멤버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 모임은 이후 캠시의 ‘후아 안 (Hua An) 활동그룹’으로 확대되었다.

그의 적극적인 자원봉사는 정부의 기관들에서 인정받아 여러 차례 상도 받았다. 2009년에는 카스 준 이사 중 한 명이 되었고 후에 원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카스 칼럼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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