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습니다. 산의 푸르름도, 강물의 잔잔함도, 그 주변을 노니는 새들과 이구아나들도 모두 3개월여 전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습니다. 못 본 동안 살이 통통하게 붙은 오리 떼 중 한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고 저를 향합니다. 씩씩한 야생칠면조들은 여기저기에서 구멍을 파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107일만에 ‘일단’ 풀린 NSW주의 코로나19 록다운… 지난 토요일, 아내와 저도 모처럼만의 산행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시드니산사랑 정예멤버 열두 명도 반가움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준비해온 간식을 나눠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운 고마운 시간… 말 그대로 ‘소확행’의 현장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상… 늘 함께 할 때는 잘 몰랐는데 ‘꼼짝 마!’를 당하고 있었던 3개월 보름 남짓 동안은 그 평범했던 시간들이 너무너무 그립고 소중했습니다. 허구한날 집에만 있으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몸도 찌뿌둥하고 머리도 띵하고 늘 피곤했습니다.

그렇게 산행을 하고 나니 몸도 좀 가벼워진 것 같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습니다. 이제 토요일은 물론, 평일에도 이틀은 꾸준히 산행을 하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서서히 시작해야겠습니다. 조금 더 상황이 나아지면 막 물이 오르기 시작했던 짐 (GYM)과도 다시 친해질 겁니다.

코로나19가 강탈해갔던 것 중 가장 큰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집들도 대부분 그랬겠지만 록다운이 완화된 첫 토요일, 우리 집에서도 그 동안 미뤄놨던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잘 가꿔진 뒷마당 잔디밭을 달리며 공놀이도 하고 텃밭이랑 화단에 물을 주는 에이든과 에밀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편의 그림동화였습니다.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에밀리의 애정공세(?)는 정말 대단합니다. 요즘 녀석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안아줘!”입니다. 제 품에 안겨 집안 여기저기를 다니면서도 쉴새 없는 재잘거림이 이어집니다. 저와 바짝 붙어 앉아 놀이를 하며 깔깔대는 목소리는 우리 집이 행복한 가정이라는 확연한 증거가 됩니다. 녀석도 언젠가는 지 오빠처럼 배신(?)을 때리겠지만 지금은 할아버지가 제일 좋다는 고백을 서슴지 않습니다.

활달한 성격의 에밀리에 비해 에이든은 은은하지만 속이 참 깊습니다. 일 때문에 잠시 나갔다 들어오는 저를 보더니 “하버지, 얼른 와서 고기만두 먹어!” 합니다. 할아버지 오면 준다고 고기만두 세 개를 따로 챙겨놓는 모습이 너무너무 예뻤다고 합니다. 혼자서 잘 놀다가도 가끔씩은 제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은근한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이 피부와 숨결로 느껴집니다.

“나, 쪼끔 놀았어…” 어느덧 밤 열 시가 넘은 시각, 이제 집에 가자는 엄마의 이야기에 에이든이 살짝 볼멘소리를 합니다. “에이든, 너 일곱 시간도 넘게 놀았으면서도 쪼끔 놀았어?” 하는 지 엄마의 질문에 “응, 나 쪼끔밖에 못 놀았어” 합니다. 녀석은 계속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놀다가 거실에 이불을 펴고 다같이 자고 싶은 겁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지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 정리를 마친 두 녀석이 “또 놀러 올 게” 하며 우리의 품에 안깁니다. 너무 작아서 안아 올리기에도 조심스러웠던 녀석들이 이제 여섯 살 반, 네 살이 돼갑니다. 그만큼 제 머리털도 더 많이 줄어들었지만 “하버지, 대머리여도 괜찮아”라며 저를 꼭 끌어안는 녀석들이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며칠 전에는 고양이가 느닷없이 얼굴을 할퀴어 우울해하는 에밀리 사진을 받고 속이 상했는데 이내 동영상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녀석은 “할머니 하버지, 저 괜찮아요. 할머니 하버지, 사랑해요!” 하며 한쪽 눈을 찡긋, 손바닥 키스를 날렸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크고 소중한 행복이 또 있을까요? 아직 해결해야 하고 극복해야 할, 힘들고 짜증스런 일들이 많지만 평범한 일상 속 사랑을 되찾을 수 있게 돼 정말 고맙고 행복한 요즘입니다.

 

**********************************************************************

 

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Previous article60년만의 이산가족 상봉
Next article카테나 할머니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