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10년짜리 운전면허증이 만료됐다. 내게 남아 있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기에 재발급 받자고 마음 먹었다. 운전면허증 발급하는 AA에 갔다.

AA직원은 친절했다. 직원은 내 나이가 75세가 넘음으로써 가정의에게 검사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운전면허증 발급 때면 부실한 한쪽 눈 때문에 으레 찾았던 OPSM을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때 10년짜리 운전면허증 발급받을 때, OPSM에 가서 눈 검사를 받았다. 검사비용으로 적지 않은 지출이 있었다. 검안사 (檢眼士)의 이상 없다는 사인 대가로 억지 구매한 사용하지 않는 비싼 안경은 두고두고 나를 불쾌하게 했다.

나는 눈 때문에 힘들기는 했지만, 큰 어려움 없이 잘 살아왔다. 한데 검안사는 내 눈이 운전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사인하는 것에 엄청난 생색을 냈다. 생색에 대한 대가는 검사비 외에 성의표시 해달라는 꼬드김에 못 이겨 고가의 안경을 맞춘 거다. 심지어 눈 수술을 받기 위한 검사 때는 터무니없이 비싼 선글라스를 구매해야 했다. 어쨌거나 그런 연유로 OPSM은 나에게 매우 불편한 이미지로 각인됐다.

OPSM을 찾지 않는 것 만으로도 불편함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 같아 상쾌했다. 나는 조금 들뜬 기분으로 가정의에게 연락했다. 그것 또한 기분 좋게 바로 예약이 됐다. 왠지 오늘 하루가 멋진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의 가정의 ‘닥터 박’은 거의 25여년동안 내 건강을 1차적으로 챙겨주고 있다. 내가 대장에, 심장에, 혈압에, 탈장에 문제를 느꼈을 때도 그의 진단과 처방으로 편하게 치료받았다. 내 몸에 조그만 이상이 느껴져도 나는 걱정이 없다. 내가 ‘박선생’이라고 부르는 가정의를 찾아가면 되니까.

닥터 박은 너그럽지 못하고 꼬장꼬장한 내가 느끼기에도 참으로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긴 세월 동안 세심하고 깔끔한 진료 자세나 잘난 체 하지 않는 겸손한 언행에 변함이 없다. 그는 사람들 건강관리 할 자격이 있는 의사다. 닥터 박은 오랜 세월 내 건강을 세심하게 살펴서 내 몸뚱이 곳곳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가면 안심이다.

그에게서 운전면허증 갱신에 필요한 검사를 받았다. 내 몸뚱이를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꼼꼼하게 여기저기 검사했다. 앉았다 일어서기, 무릎 굽혀 펴기, 시력검사, 눈동자 좌우 움직임, 혈압 수치 등등 안전운전에 관련된 제반 사항을 검사했다. 역시 신뢰가 가는 사람이다.

박선생이 검사하고 사인한 운전면허증 갱신 관련서류를 건네주면서 그랬다. “이 서류 개봉하시면 안됩니다. 그대로 AA에 제출하십시오. 제가 보기엔 운전하시기엔 아직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제 운전면허기간은 5년입니다. 80세가 되시면 그때부터는 2년 입니다.”

80세? 까마득한 세월 인줄 알았다. 다른 사람의 세월 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박선생은 그것이 바로 내 가까이에 와있는 나의 세월 임을 깨우쳐주었다. 나는 박선생에게 물었다.

“5년이라면… 80세까지만 운전하라는 건가요? 그건 억울하다고 악착같이 더할 수 있다고 버티면, 그럼 2년만 더 하라는 건가요? 정부도 고령자들 운전하는 게 꽤나 불안한 가 보네요.” 박선생도 나도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웃음은 씁쓸함도 섭섭함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공허함 이었다.

80세넘어 90세까지 살면 운전면허기간은 얼마만큼 될까? 1년? 6개월? 3개월? 아니 분명히 운전면허신청은 이제 그만하라고 다독일 거다. 나는 알았다. 갱신되는 이번 운전면허증이 어쩌면 내 생에 마지막 ‘생존확인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박선생이 넘겨준 서류를 AA에 제출했다. 상냥한 담당 여직원이 웃으라면서 얼굴사진을 찍고 임시 운전면허증을 발행해주면서 “Have a good day!”라고 인사를 했다.

AA직원의 친절, 가정의 박선생의 섬세한 검사와 설명, 푸른 하늘, 봄빛 짙은 실바람은 마치 노래 제목처럼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었다. 아무렴, 그 멋진 날에 즐거운 마음으로 찾은 것, 낮술이었다. 허전할 때면 무심히 찾던 낮술에 그런 안락함이 담겨있음에 나는 행복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편안하고 즐거우면 행복한 것이다.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하면 그렇게 되느냐고 물을 것 없다. 긴장되고 불편하던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근심걱정이 날아가버리면 된다.

세상 살아가면서 햇살 가득 눈부신 날, 나무아래 앉아 여유 있는 몸짓으로 낮술 한잔 하는 모습은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는 풍경 중 하나이리라.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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