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날에

매니저가 한참을 설명한다. 뭔(?) 소리인지…

‘터미네이션’ 단어 한 개가 쏙 들어왔다.

뛰는 가슴을 누르고 심각한 표정으로 “나 지금 잘린 거야?” 묻자 “그렇다”고 한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나는 차분하게 ‘12년간 사이드 미러 파손, 승객불만… 등으로 경고 받은 적이 없었다. 갑자기 1년 전부터 이런 경고를 누적시켜 해고하는 건 부당하다. 하지만 70살에 영어도 어눌한 내가,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온 마음만 기억하겠다” 고 했다.

굳어졌던 그들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넌 좋은 시내버스 운전사였다. 너와 승객의 안전을 위한 결정… 어쩌고 저쩌고…” 하는 변명(?)을 쿨하게 뒤로했다.

사실 5년을 기다려온 해고*였기 때문이다.

 

기다려왔던 마음과는 달리 회사주차장을 나오는데 갑자기 갈 곳이 없다.

가슴이 덜컹 하고 내려앉았다.

휑한 바람이 쏜살같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아내의 얼굴이 큼직하게 떠올랐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 오늘 해고 됐어.” 문자를 보냈다.

위로가 필요했을까? 수년 전 해고된 K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 해고된 H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두 사람 다 해고됐을 때 이런 느낌이었구나. 몇 번 만나 위로해줬는데 지금 난, 만날 놈이 없네….’

어번 (Auburn) 주변을 왔다 갔다 몇 바퀴째 돌고 있는데 정말 갈 곳이 없다.

더 전화할 데도 없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코로나19 세상임을 실감한다.

‘에이!’ 집으로 방향을 잡는다.

‘혼자 집에서 한잔하지 뭐….’

 

13년 전 비올리아 (현 Transdev) 매니저 짐이 채용면접에서 “해고될 때까지 일할 수 있냐?”고 물었고 “그러겠다”고 했다.

오늘 그 약속은 지켜졌다.

근무 첫날,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잡음투성이 영어 무선교신을 당연히(?)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나에게 짐은 “오! 지저스 크라이스트!”하고 외쳤다.

나는 “파든?” 했고 한인 K는 저녁 환영식에서 “형, 아까 짐이 미치고 팔짝 뛰겠네 한 거야!”했다.

그 말을 듣고 늘 나는 ‘오늘 해고될 수도 있다’ 는 마음으로 출근했었다.

시키는 일은 무조건 다 했다.

많은 동료들은 잔업이나 힘든 일을 피했고 짐은 이를 가장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내 장점이라 믿었고 이는 적중했다.

두 달 걸리는 정규직이 열 달 후 된 것도, 지금 해고된 것도 내겐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호주 직장생활을 잘 마무리한 거야’ 하면서도 ‘아내가 펜셔너 되는 2년은 더 버티려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올라왔다.

끝없는 내 욕심을 바라보며 ‘그래도 이만큼 버틴게 어디야…’ 스스로 위안해보는데 그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올라왔다.

컴플레인 올 때마다 밤새 작성했던 영작문(?)들, 호주 럭비경기 후 취객들의 타격에 놀란 일, 레일웍 하며 버스정류장에 안 섰다고 유리창 깨고 나를 번쩍 들어던진 사건, 비 오는 날 칠흑 같은 밤에 룩우드 공동묘지를 지나는데 빈 버스에서 ‘딩동’ 하는 정차신호음이 울리던 일….

셀 수 없는 일들이 연말 하버브리지 불꽃놀이처럼 올라가서 화려하게 사라졌다.

 

아내한테서 ‘어서 오십시오’ 하는 문자가 왔다.

‘오늘 드디어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셨다. 모두 축하해주세요!’ 카톡 가족방에도 올렸다.

미국 큰아들과 한국 작은아들이 축하(?)와 위로의 뜻을 보내왔다.

아내가 소주와 순대국을 사준다.

갑자기 목이 메인다.

59년 전인가? 고사리 손을 호호거리며 새벽 찬바람을 가르고 뛰면서 외쳤던 “신문이요!” 소리가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었다.

 

* 해고 (수당 및 기타수익: 약 8000불)

 

낡은 작업화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전직 버스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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