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 하고 나 하고

테디는 우리 가족이다. 흰색 털을 가진 내 팔뚝만한 자그마한 반려견이다. 녀석은 수캐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디섹스 수술을 받아 장가도 못 갔고 당연히 마누라도 자식도 없다.

마누라 비위 맞추느라 눈치 볼 일도 없다. 자식새끼들 먹여 살리자고 찬바람 불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벌판을 헤맬 필요도 없고,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날며 힘겹게 날개를 퍼덕일 필요도 없다. 자아 (自我)니 자존이니 하면서 머리 싸맬 이유도 없다. 상팔자 견생 (犬生)이다.

녀석은 열세 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산수 (傘壽)는 넘었고 졸수 (卒壽)쯤 된다. 나 보다 많이 늙었다. 이 나이쯤 되다 보니 나나 녀석이나 수시로 함께 걷기운동을 한다. 인터넷에서 걷는 것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이라는 걸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걷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나뿐만이 아니다. 허풍을 좀 떤다면 내가 사는 동네사람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가 틈만 나면 반려견을 데리고 걷기에 여념이 없다. 어쩌면 턱없이 오래 사는 것이 골치 아픈 일일지 모르지만 하여튼 열심히 걷는다.

나는 테디랑 걸으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사는 동안 침대 위에서 끙끙대는 일이 없기를 더 바란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맙다. 언젠가는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걷는 것만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일까? 어느 건강전문박사는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이 최고의 건강 비결이라고 주장했다.

테디는 내가 데크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 내 곁에 앉아 해바라기를 했다. 그러다 지루하면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참새를 쫓기도 하고 잔디밭에서 뒹굴며 편안했다. 그런 녀석이 어느 날부터 제 자리에 엎드려 꼼짝하지 않는다. 산책할 때만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십 수년을 가족 사랑을 독차지한 녀석에게 일대 변화가 일어난 거다. ‘잠봉’이가 우리 가족에 합류하면서다.

잠봉이 몸뚱이는 테디보다 세배는 크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잠봉이를 수의사가 된 큰손녀가 가엾다고 데려와 우리가족 삼은 거다.

잠봉이는 집에 오자마자 온 마당을 휘젓고 다녔다. 거실 소파도 녀석이 차지했다. 쪼끄마한 테디쯤은 안중에도 없다. 나와 테디가 해바라기 하던 데크 소파도 독차지해버렸다.

잠봉이가 집에 들어온 이후 테디는 일상의 변화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잠봉이가 보이지 않아야 마당에 나가 용변을 본다. 테디는 변화를 인정하지 못해 우울하다. 가볍게 수긍하면 좋으련만 녀석도 나처럼 고집 센 늙은이라 오랜 세월 몸에 밴 일상의 변화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가 보다.

얼마 전에 아들 내외가 의견을 나눠 우리가족 식사 패턴을 조정했다. 우리가족은 이제부터 식사는 각자가 알아서 하자는 것이었다. 시장하면 자기가 알아서 먹을 것을 챙겨 먹으면 된다고 했다. 물론 아내나 며느리가 기본적인 먹거리는 준비해놓는다.

사회활동을 하는 며느리가 지친 몸과 마음으로 퇴근하고 돌아와서 가족의 저녁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피곤한 상태에서는 만사가 귀찮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개인주의인 것으로 잘못 해석되고, 장유유서 (長幼有序)가 “나이만 먹으면 다냐”고 폄하되는 21세기에 여성이 의무처럼 가족 식사를 비롯해 집안일을 전담한다는 건 시대에 뒤쳐진 부적절한 타성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깨우쳐준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일상에도 느닷없이 변화가 요구된 거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화가 나고 어이없고 우울했다. 오랜 세월을 삼강오륜 (三綱五倫)의 유교문화 속에서 살아온 나는 이런 변화가 상당히 불쾌했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자신을 정리했다. 가족이란 오순도순 모여 앉아 식사를 나누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자신을 내려놨다. 나는 시대가 변한 만큼 가족 문화도 변해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 무지했던 모양이다. 남성도 식사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시대의 흐름에 아둔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살아가면서 무엇에서 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무리 걸어도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모두 알다시피 건강의 최대의 적은 스트레스다.

테디나 나나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걷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인 것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아마 녀석도 곧 변화를 받아들일 거다. 그래야 남은 세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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