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지 모른다. 테니스게임에 져도 신경질 짜증 화가 나지 않는다. 나는 게임을 할 때면 나에게 말한다. “최선을 다 한다. 그러나 즐긴다.”
내가 테니스를 시작한 건 45여년전이었다. 주말 테니스였다. 나는 승부욕이 유난스러웠다. 취미인 테니스게임을 하면서도 지면 화가 나곤 했다. 자신은 물론 파트너에 대해서도 짜증이 났다. 이런 못된 성질은 70이 되어서도 그랬다.
좀 거시기한 얘기지만, 어느 날 문득 “이기면 돈 나오냐? 지면 무슨 일 생기냐? 즐겁게 운동하러 나온 거 아니냐? 즐겨라 즐겨!”라며 자신을 질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였는지 세월이 흘러서였는지, 늦게나마 몇 년 전부터는 게임에 져도 화는 나지 않고 그저 “젠장… 졌네” 그래졌다.
내가 지금 테니스 멤버들인 중국계홍콩출신들과 어울린 것이 13년전이다. 처음 어울렸을 때 한국인은 3명이었고 중국인은 16명이었다. 그전에는 한국교민들과만 어울렸다.
교민들과는 으레 그렇듯 저녁시간 대에 모여서 게임을 했다. 어느 날부터 눈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조도 낮은 전등 아래서 빠르게 날아오는 공이 눈에 잡히질 않았다. 휙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속절없이 포인트를 내주는 것에 짜증이 났다. 검진을 했더니 백내장이었다.
눈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밝지 않은 불빛 아래서는 여전히 어려웠다. 낮에 테니스 하는 모임을 수소문했다. ‘한국꼰대들’만 모여 낮에 테니스 한다는 단체를 소개받았다. 그 모임은 3등급부터 1등급으로 등급이 나눠져 있었다.
모임에 나가면 실력에 관계없이 무조건 3등급이다. 같은 등급 꼰대들과 게임을 하고 쌓인 결과에 따라 상위 등급으로 올라간다. 기준점에 미달하면 기준점을 통과할 때까지 그 등급의 꼰대들과 게임을 한다. 무슨 프로선수 육성하는 것도 아니고 황당하고 웃겼다.
내가 나이 먹은 꼰대들 즐기겠다고 나오는 건데, 건강을 위해 취미인 테니스 치겠다는 건데, 등급이라니 어처구니없다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무시당했다. 나와는 맞지 않았다.
맑은 날이면 혼자 테니스코트로 나가 서브연습도하고 벽 치기도 하면서 운동을 했다. 그런 나를 백인코트매니저가 관심 있게 보았던지 중국꼰대들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추천해줬다.
모임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테니스클럽에 가입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면 어울릴 수 있었다. 등급 같은 건 없었다. 코트에 나오는 순서대로 어울려 게임을 했다. 게임 끝나고 돌아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였다.
단체회비라는 것도 없었다. 다만 테니스 볼 사용료로 매회 50센트 내면 됐다. 의무사항은 아니었다. 준비된 통에 알아서 넣으면 됐다. 세상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 슬슬 눈치 보면서 50센트도 안내는 꼰대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중국꼰대들과 어울린 지금의 모임에서 테니스를 즐기게 됐다.
현재 멤버들은 낮에 모여 테니스 하는 사람들이니 오후에 사업하는 몇 명을 제외하곤 모두 노후연금 받는 백수들이다. 나이들이 장난이 아니다. 제일 어린 얼라가 65세다. 거의 70세이상이다. 환갑 지났다고 명함도 못 내민다. 나이 자랑하다간 코웃음 산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멤버는 한국사람은 나를 포함해 2명이고 중국인 12명이다. 그 동안 세월이 흘러 같이 게임하던 중국인 몇 명은 저 세상으로 갔다. 신입 꼰대는 없고 퇴장 꼰대만 늘어날 전망이다.
코트분위기는 꼰대들이 게임하는 것이니 여유롭고 화기애애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지지 않으려고 요란하다. 라인 선상에 떨어지는 상대편 공은 대부분 아웃이라고 우긴다. 스코어 때문에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좋게 보면 아직도 팔팔한 얼라들이고, 나쁘게 보면 철딱서니 없는 꼰대들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지 않겠다는 승부욕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 꼰대는 눈치를 보면서 잘 치는 꼰대와 한편이 되려고 눈웃음을 치는 아양을 떨기도 한다. 파트너를 바꾸자는 괘씸하고 무례한 요구를 하는 꼰대도 있다.
거기에다 앞날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은 왕꼰대들이다 보니 스코어를 수시로 잊어버리고 언쟁이 벌어진다. 게임을 하면서 껌벅 하면 스코어를 까먹는 거다. 엄파이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서로 자기가 기억하는 스코어가 맞다고 우긴다. 한 포인트 가지고 목소리 높여 다툰다. 나이 먹으면 한국꼰대나 중국꼰대나 헷갈리고 까먹고 우기고 골치 아파지는 것은 똑같다. 몸뚱이는 늙었어도 승부욕은 젊음인 거다.
운수가 좋은 건지 다행인 건지, 나는 아직까지는 스코어를 혼동하지 않고 비교적 잘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내가 심판이 되어 판정을 하기도 한다. 자기의 틀린 스코어를 고집하는 꼰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게임 과정을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서브를 누가 먼저 시작했고, 코트에 선 서로의 위치를 지적하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설명하다 보면 나 자신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거기에다 서로 어버버한 영어가 엄청나게 고생한다. 그러다 보면 귀찮아진다. 그럴 때면 나는 모두에게 웃는 얼굴로 “엔조이!”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그들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끄덕끄덕 돌아선다. 얼라 같은 밉지 않은 풍경이다.
테니스 한 날,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면 가끔은 그날 게임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실수한 것들이 그려지고, 그럴 때마다 다음엔 이렇게 해야지 하면서 꿈결처럼 테니스를 한다. 그러다가 나도 몰래 스르르 잠이 든다. 꿈속에서도 지치지 않는 푸르른 청춘이다. 나는 그렇게 보낸 하루가 한없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