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주는 여운

가히 한국 드라마 전성시대이다. 넷플릭스 (Netflix)에 올라오는 리스트를 보면 한국 드라마 (K-Drama)가 한 장르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드라마는 작가의 이야기보따리가 연출자의 시각으로 각색 (脚色) 되고 배우라는 매개체 (媒介體)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펼쳐진다.

연출에도 창작의 요소가 가미되니까 당연히 원작자의 의도와 동떨어지게 해석이 될 수도 있고 배우의 연기 경력에 따라 시청자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가 출간이 된 책을 근거로 만들어지는데 책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은 드라마를 보고 난 여운 (餘韻)은 사뭇 다를 수 있다.

‘연을 쫓는 아이 (The Kite Runner)’의 작가 칼레드 호세이니 (Khaled Hosseini)는 1980년대 아프칸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작품은 이슬람 문화에 배경을 두고 있다.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아프칸 문화와 언어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모든 묘사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피부에 와 닿는다. 이란에서 한 달을 보내면서 익숙해진 음식, 지형, 날씨, 풍경, 동물 그리고 만난 사람들이 내 몸에 새겨준 인위적인 DNA때문이었다.

주인공인 아미르 (Amir)가 카불에서 연을 날리면서 지낸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던 감정들, 형제간 이상으로 가까이 지낸 하산 (Hassan)과의 관계,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파생된 골이 깊어진 상처를 치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나중에 밝혀진 아버지와 하산과의 관계, 무서운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을 가서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는 이야기 등 자신의 결혼생활과 나중에 들려온 하산과 그 아내의 죽음….

결국 하산의 버려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카불로 들어가야만 했던 아미르. 책을 마칠 때까지 무너져내리고 찢기는 그들의 아픔을 느꼈다. 어느새 내 가슴에 둥지를 튼 연민의 마음 때문이리라. 그 후 영화를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내재화 (內在化)가 나는 물론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감정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은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교포다. 작가의 뿌리가 한국인지라 책 이야기가 한국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좀 다른 부류의 한국인이다. 작가는 비극적인 근대 한반도가 잉태한 재일 (在日) 한국인에 주목했다. 사이가 각별한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주인공 외딸 선자의 성정 (性情)은 어질다.

선자는 일제강점기에 임신한 몸으로 기독교인 이삭과 결혼 후 그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아들 노아와 모자수를 낳는다. 노아의 친부인 한수는 야쿠자 생활을 하면서 선자의 인생에 깊이 관여한다.

솔로몬은 모자수 아들로 태어난다. 일본 형무소에서 당한 모진 고문으로 이삭이 결국 생을 마감하자 형인 요셉은 아내 경희와 함께 동생 식구들을 보살핀다.

요셉 자신도 일본 공장에서 일하다가 미군 공습에 의해 결국 불구가 된다. 대도시에 퍼부어지던 공습을 피해 시골로 대피해 있던 식구들에게 한수는 선자 어미인 양진을 한국에서 데리고 온다.

밭에서 일을 하던 선자는 다가오는 어미를 만나는데 작가의 표현이 덤덤하다. 그러나 나만의 무대에서는 이 모녀 상봉 순간이 숨이 멎을 듯 극적이다. 결국 나는 꺼억 꺼억 흐느끼고 말았다.

영민한 노아가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하자 한수는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내색은 못하지만. 몰래 온갖 뒷바라지를 하지만 결국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노아는 잠적을 하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다. 이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아비로서의 한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작가는 오롯이 독자 몫으로 남겨 둔다. 일본에 거주하지만 여전히 외국인으로 취급되며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면서도 한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능력이 있어도 주류사회에 동참할 수 없는 노아와 모자수 형제 그리고 솔로몬도 파친코라는 직업으로 내몰리게 되는 모순투성이의 사회적 구조를 가진 일본을 작가는 고발하고 있다.

노년의 선자는 훠이훠이 저 세상으로 간 남편 이삭의 무덤가에서 굴곡진 자신의 생을 되돌아본다. 애지중지 키웠건만 자신의 가슴에 묻히고 만 큰아들을 몸부림치게 그리워한다. 그곳에서 그녀가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동안 나는 또 하염없이 울었다.

책 속에는 많은 삶의 무늬와 결이 퍼덕이고 있다. 내가 마주한 이들은 어려운 세상 풍파가 만든 마음의 굳은살을 안고 살아간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는 육신의 상처만큼 치명적이다. 상처 부위가 커 출혈도 심하고 치유 기간도 오래 걸린다. 욱신거릴 그들의 통증을 완화시켜줄 방법을 모른다.

잠깐이나마 그들의 입장이 되어 고통을 느끼고 우는 것으로 나도 그들만큼 아프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칼에 베이며 평생 견디는 것인가?

 

 

박석천 교수의 '따로 또 같이' 여행기 ① 뉴질랜드 북섬, 그 북쪽의 끝을 가다!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챨스스터트대 교수)

 

 

 

Previous article학원을 이기는 독학 영어회화 1 Unit 16 – ①
Next article카스 ‘동양고전 읽기 반’을 다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