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더라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질곡을 힘겹게 건너온 사람들이 인생 새옹지마 (塞翁之馬)라는 말과 함께 푸념하듯 하는 소리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니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타이르는 말이다.

공수래공수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빈손철학’이 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세상 눈치 개의치 않고 온갖 수단을 다해 얻은 부와 명예와 권력도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일장춘몽 (一場春夢)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나는 젊은 시절 이 말을 극도로 싫어했다. 안 가진 것이 아닌, 못 가진 자들이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을 변명하기 위해 늘어놓는 ‘군자 흉내내기’ 라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주위에서 이 말을 즐기는 사람들은 사는 것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삶에 대한 허무주의 냄새를 피우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결코 허무주의도 스스로의 위로도 아닌 자기성찰 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나이가 들어 있었다.

53년만에 또 수술대 위에 누워야 했다. 이번에는 무료 수술이었다. 담당의사가 말했다. “탈출된 장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는 하복부 오른쪽 부분을 10cm정도 절개해야 한다. 밀려나온 장을 밀어 넣고 찢어진 부분을 봉합하고 다시 절개한 부분을 꿰매야 한다. 찢어진 부분을 봉합하는 물질은 육체의 일부분이 돼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거해야 하는 수술은 필요치 않다. 이 모든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 이런 절차에 동의한다는 ‘수술동의서’에 본인과 보호자가 사인해야 한다.”

나는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 통증을 견디면서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보호자인 아들도 사인을 했다. 그때, 무릎이 부서져 수술을 할 땐 둘째 형님이 보호자사인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바람 같은 세월이 내 보호자를 둘째 형님에서 아들로 바꿔 놓았구나! 침대에 눕혀져 ‘수술대기병실’로 옮겨졌다.

53년전 그날 동짓날, 유난히 새알팥죽을 좋아하는 나에게 어머니가 “웡기야, 니 좋아하는 팥죽 써놨다. 와서 묵고 가그라”라고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친구 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신문배달을 끝내고 단칸 셋방에 사는 어머니한테 가려고 길을 건너다 택시에 치었다. 무릎이 부서졌다. 택시운전사가 데려간 동네병원에서 무릎수술을 받았는데 돌팔이였다.

고국은 가난했다. 가진 것 없는 민초들의 몸뚱이가 고장 나면 무료로 고쳐줄 능력이 국가에는 없었다. 영원히 지팡이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불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나는 둘째 형님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저비용으로 큰 병원에서 다행이 다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대기병실에서 몸뚱이를 샅샅이 검사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수술 층으로 옮겨졌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마취 담당의사가 수술을 하고 깨어나기까지는 어림잡아 5-6시간 걸릴 테니 편안하게 푹 자라고 농을 던졌다.

다시 무릎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로 옮겨질 그때도, 전신마취를 한다고 했었다. 나는 전신마취 한다는 것이 무서웠다. 마취 당하고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냐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돈을 많이 벌어 배불리 밥을 먹고 폼 재며 살고 싶었다. 그것은 비속하거나 천박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당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었다. 그러나, 전신마취를 당하면 어떤 걱정도 두려움도 없어진다는 걸 마취에서 깨어나고 나서야 알았다. 비록 인위적인 죽음이긴 하지만 죽음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전신마취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쩌지? 라는 그 옛날 같은 걱정은 없었다. 아까운 것도 없었다. 아쉬운 것도 없었다. 해야 할 것들도, 이뤄야 할 것들도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가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다. 새 생명을 가질 수 없어 제가 살아간 세상에 흔적을 남길 수 없는 딸아이의 해맑은 얼굴이었다.

수술대에 누워 팔뚝에 연결해놓은 주사 관을 통해 차가운 액체가 스며든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멈췄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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