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책

봄이면 풀린다는 백봉 선생의 말처럼 정 씨가 길례에게 돌아오나?

오래 전에 읽었던 박완서의 단편소설 제목 하나가 떠오르질 않아 온종일 애를 먹은 적이 있다.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회적인 작가로 끝날 것이다’라고 평한 사람도 있지만, 그녀가 생전에 집필한 소설, 산문, 그리고 동화집을 합하면 백오십 편이 족히 넘는다.

 

01_식모살이 하던 길례와 물역상 배달꾼 정 씨가 같은 날 쫓겨나는

여러 출판사가 펴낸 작가의 전집 목차들과 단행본을 인터넷으로 몇 번 훑고 나서야 그 글이 ‘창 밖은 봄’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아, 그렇지…’ 식모살이를 하던 길례와 물역상 배달꾼 정 씨가 같은 날 쫓겨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됐었다.

정 씨가 비쩍 마른 길례를 가여워해 짜장면 한 그릇 사 먹인걸 주인 아들에게 들켰기 때문이다. ‘불결하다’는 말과 ‘꼴에 연애질이냐’고 서슬이 퍼렇게 호통을 치는 주인들이 무서워 두 사람은 밀린 월급과 맡겨놓은 돈을 달라고 할 엄두도 못 내고 거리로 내몰린다.

야방이라고 집 짓는 자리의 자재들을 지켜주는 일을 얻었지만, 금방 겨울이 들이닥쳐 그나마 정 씨는 몇 달 지속해온 공사장 일거리도 잃고 말았다. 시멘트도 바르지 않고 쌓아 올린 벽돌집 사이로 칼바람이 들이치는데, 그런 움막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길례 부부가 봄까지 이 긴 겨울을 버티려면….

그런 그녀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터진 수도관을 손봐주며 언 땅을 파던 정 씨가 어느 날 해가 진 뒤에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었다는 생각으로 며칠 거리를 헤맨 끝에 그녀는 예전에 주인집 사모님과 가본 적 있던 점쟁이를 찾아간다.

 

02_길례는 나뭇가지에 얼굴 그림을 걸기 위해 길을 나섰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에 바늘을 꽂는 것처럼 진땀을 흘려가며 길례는 남편 정 씨의 나이만큼 종이에 그린 얼굴에 바늘을 꽂았다.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비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리는 길례에게 점쟁이가 지시해준 비방이다.

길례는 서쪽으로 나 있는 나뭇가지에 얼굴 그림을 걸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리고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길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고 백봉 선생을 찾아가 종이를 돌려준다.

주인 없는 나무가 없다는 길례를 향해 ‘아무 나무에나 걸고 올 일이지…’ 하며 백봉이 타박을 주었다. 우거진 가지들이 길을 향해 뻗어 있지만 모든 나무가 집 담장 안에 들어 있었다. 어렵사리 언덕 위의 어린 나무들을 발견했지만, 나라에서 심은 나무라는 생각이 들자 그런 흉하고 불길한 걸 도저히 걸어놓고 올 엄두가 나질 않는다.

승진을 위해 대적하는 사람의 신발을 훔쳐다가 삶아 먹으라거나, 흉측한 제웅 (짚으로 만든 형상)을 만들어 라이벌 집 대문에 걸어 놓으라는 등의 비방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해 내는 사람들을 백봉은 수없이 보아왔다.

 

03_그렇게 무욕하고 순한 눈을 가진 여자를 생전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런 그가 길례를 보며 ‘그렇게 무욕하고 순한 눈을 가진 여자를 생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어두운 겨울 밤이 되고 누구네 집 담 밖으로 뻗은 가지에 슬쩍 걸어 놓는다고 해도 볼 사람이 없건만, 그런데도 그녀는 그 짓을 못 한다.

점쟁이는 그런 그녀에게 인생의 측은함을 느끼고 길한 말 한마디를 던져 준다. ‘봄이면 풀려.’ 길례는 백봉 선생의 말을 믿고 조용히 봄을 기다린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길례의 창에 성에가 안 끼더니 창밖에 저만치 봄이 오고 있었다.’

누구에게 빌려주었는지 ‘창 밖의 봄’ 이 내 책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마침 한국에 나가 있는 동생에게 한 권 사서 보내라고 부탁을 했었다. 읽었던 소설 중 길례와 백봉이라는 등장인물이 유독 뚜렷하게 기억되는 글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문학회 회원들과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어보고 싶다.

이 글을 마치면서 독자들이 물어올 것 같은 질문을 상상해본다. ‘봄이면 풀린다는 백봉 선생의 말처럼 정 씨가 봄이 되어 길례에게 돌아오나?’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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