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흉터

주말에 나 홀로 낚시를 즐길 때였다. 물고기를 잡아오면 아들은 신나게 즐거워하며 많은 호기심을 보였다.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낚시를 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 단둘이 호젓하게 춘천 소양댐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특별한 가르침 없어도 항상 스스로 모든 걸 깨우치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신기한 아들이라 무엇이든 알아서 할 것으로 기대했던 게 화근이었다. 낚시채비를 해줬으니 아빠 따라서 잘하겠지 했다.

한번도 낚시 해본 적이 없는 어린 아들의 당연한 실수 하나하나에 세심한 가르침도 없이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많은 잔소리를 했었나 보다. 어느 순간 녀석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보고서야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게 억울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의 어린 아들 눈물은 처음이었다. 평소 우는 모습도 귀엽고 예뻐했던 시기였는데, 말썽 한번 일으키지 않는 착하고 완벽했던 아들의 작은 실수들이 반가워서 그랬나?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슬프고 미안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수시로 조심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른 눈에 아무리 똑똑하고 완벽한 아이도 섬세한 사랑과 보살핌의 방심이 큰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참 혈기 왕성한 철없는 아빠였다. 문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빠와 낚시 가고 싶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함께 갈 일 없을 것 같은 예감이다. 가슴 한구석 깊숙이 자리잡은 흉터로 남았다.

아들이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매일 아침 집 근처 장군봉에 올라가 아빠와 함께 운동한다며 따라나선 첫날이었다. 새벽녘 잠결에 뭉그적거리며 멀리서 비탈길을 겨우 올라오는 아들에게 소리쳤다. “좀, 빨리 와라! 시간 없다!” 갑자기 돌변한 차도남의 짜증스러운 한마디를 만나면서 얼마나 놀랐을까?

문제는 아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내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더 큰 일은 장군봉 정상에서 벌어졌다. 정상에 있는 원형트랙은 힘차게 걸어 다니고 운동하며 땀 흘리는 어른들만의 장소였다.

매일 하던 대로 빠르게 움직이며 아들 챙길 생각을 못했다. 내려갈 때가 돼서야 안 보이는 아들을 찾았는데, 얼굴이 부어 있고 눈물 범벅 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눈이 충혈된 아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잠이 아직 덜 깬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구름 위를 걷듯이 정신 없이 걷다가 수평대에 눈언저리를 부딪친 것이었다. 불이 번쩍이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으리라. 얼마나 놀라고 아팠을까?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이마에 진땀이 난다.

컴컴한 새벽 곳곳엔 철봉과 수평대가 있어 어린이에겐 부딪칠 수 있는 위험한 장소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모두가 걷기에 집중하며 새벽 운동을 마치면 즉시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정말 기계적 인간이었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출근 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다음 날부터 한동안 환한 아들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마음은 있었지만 잦은 지방출장으로 사과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아빠와 가까워지고 싶은 그 애틋한 마음에 소홀했던 미안함이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두 번째 흉터로 남았다.

샌프란시스코 아들 집을 역병 때문에 두 해 만에 방문해 한 달 정도 체류했을 때였다. 시드니로 돌아오기 며칠 전 아빠 엄마를 위한 송별 쇼핑을 거의 마무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입을 바지 두 개를 아들이 골라와 평소와 어울리지 않은 살가운 미소와 함께 갑자기 “아빠가 결제하실래요?” 했다.

전혀 예상 못한 돌발성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왜?” 했다. 녀석은 아무 말 없이 휙 몸을 돌려 쌩하게 계산대로 가고 있었다. 찬바람에 남방 자락이 펄럭, 내 가슴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계산하고 되돌아 나오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진짜였네’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참 고약한 상황이 됐다. 우리를 위해 그 비싼 선물들을 한 보따리 잔뜩 사주고 난 후 고작 100불도 안 되는 바지를 사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결혼 10년 돼가는 마흔 살 아들의 어설픈 추억놀이를 생각 없이 외면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 옛날 서너 살 때의 장난감 일이 생각났다. “장난감 살 돈 벌기 위해 아빠가 한 달 동안 집을 떠나도 되는지 3일 후에 말해줘” 하니 말없이 3일을 지내고 나서 “장난감 안 사겠다”고 말한 아들이었다.

얼굴 보기 힘든 야간대학생 아빠 때문에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것 같아 미안하고 대견했었다. 고가의 노트북에 비즈니스 항공권도 매번 거침없이 건네는 녀석에게… 참 어이가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녀를 위해 책상, 의자, 침대를 아낌없이 사주는 할아버지를 본 김에 아들이 바지 두벌 사달라며… 인심 쓰듯이 슬쩍 기회를 준 것인데….

시드니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불편한 마음이 지속됐다. 몸에 밴 가난을 극복하는 습성을 아직도 벗지 못하는 스스로에 몸서리가 쳐졌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자문해보지만 어머니와 내가 다를 게 없었다. 평생 살아온 습성이 바뀔 리가 없다. 그러니 엉뚱한 결심을 해본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만나지 말자. 최소한 더 이상의 흉터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 세 번째 흉터를 마지막으로 하자고….

 

 

글 / 정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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