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양쪽 벽에는 레지던트 (이곳에서는 입주해 사는 노인들을 영어로 이렇게 부른다. 역하면 주민.)들이 특별활동시간에 만든 작품들이 단정하게 붙어 있다. 색종이 접기, 자수, 카드 만들기, 유화도 몇 점 붙어 있다. 유화 한 점에는 레지던트의 이름과 이곳에 입주한 날짜 그리고 퇴거한 날짜까지 자세히 적혀 있다. ‘헨리 밀러 1943 년 입주-1956 사망.’ 내가 세상에 나온 날 헨리는 저 세상으로 갔다. 아마도 유품으로 남긴 작품을 직원들이 표구해서 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보통 입주하고 5-6년 이상을 끌지 않는 곳에서 13 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이 답답한 곳, 어떻게 보면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곳에서 13년 세월을 보낸 헨리의 모습이 머리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냥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전혀 구별이 없는 이름없는 존재의 아득한 세월이었으리라.

장모님 방의 방 번호는 27번이다. 방 번호와 함께 레지던트의 이름이 팻말로 만들어져 역시 단정하게 부착되어 있다. 도어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현정 아빠에요. 문이 잠겼어요.”

안 쪽에서 인기척이 있는지 문에 귀를 바짝 대고 들어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도어를 두드린다.

“어머니 안에 계시죠. 저 현정아빱니다.”

여전히 아무 소리가 없다. 순간적으로 두 가지 시나리오가 머리를 스친다. 하나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계신 것이다. 또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장모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어머님 방 맞은 쪽 방 좌측 벽에 걸린 수채화가 눈에 들어왔다. 프린트 그림이다. 전에는 눈 여겨 보지 않았던 그림이다. 그림은 놀랍게도 ‘샘’이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유화이다. 풍만한 몸을 갖고 있는 나부가 토기로 만든 물동이를 어깨 위로 들어올린 다음 물을 쏟고 있는 그림이다. 물동이로부터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와 여인의 서 있는 누드와 차분하고도 균형잡인 구도를 이룬다. 여인의 고전적인 관능미가 화폭 전체를 압도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굿모닝, 마이클. 문이 잠긴 모양이죠?”

앵그르가 그린 관능의 세계에 잠시 잠겨있던 나의 의식을 깨운 사람은 케어러 조이스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이고 혼자 살고 있다고 아내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15 년 전 부모를 따라 브라질에서 이민 왔으며 현재 이곳에서 케어러로 일하면서 RN (등록된 간호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도….

“아, 네, 안녕하세요? 네, 안에서 문이 잠긴 것 같습니다. 마스터 키 있나요?”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날씬한 허리 춤에 걸린 키 뭉치에서 노란 색 금속 키 하나를 골랐다. 회색 점퍼에 검정색 바지를 한 그녀의 몸매가 풍기는 매력을 너싱홈의 단조로움을 강조한 유니폼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계신 장모님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누운 자세로 얼굴만 돌린 채 두 사람을 응시하신다. 피안의 세계에서 방문한 먼 조상의 모습이랄까….

“미세스 강, 문이 잠겼네요. 아마 다른 케어러들이 잠근 것 같아요. 요즘 좀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분이 아무 방이나 불쑥 들어가는 일이 있었거든요.”

문이 잠긴 것이 마치 자신의 실수라도 되는 것처럼 조이스가 자세하게 변명조로 설명한다. 그제야 장모님의 얼굴에 힘없는 미소가 만들어진다. 아직은 세상이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그래. 현정아빠 왔구나. 앉아라.”
“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잠시 들렸습니다.”

“미세스 강, 점심시간이에요.”

조이스는 어머님을 공동식당으로 모시고 가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미세스 강, 먼저 화장실 일 보셔야죠?”
조이스의 민첩한 몸이 30킬로도 안 되는 노인의 몸을 베드로부터 워커로 가볍게 옮긴다. 순간 베드 시트가 벗겨 지면서 장모님의 발이 거진 노출되었다. 사람의 골격 위에 피부만 살짝 얹은 형국이다. 아유쉬비츠를 방문했을 때 전시실에 진열된 흑백사진들이 보여주던 유대인들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 그대로이다. 이번에는 실물로… 여자의 늙은 몸은 의료적 케어의 대상일 뿐… 조이스가 허리를 굽혀 둔부까지 올라간 치마를 내려 노출된 다리를 가려준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신 장모님은 워커에 걸터앉은 채 조이스에게 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의외로 장모님의 청을 한 마디로 거절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유이다. 장모님은 워커를 천천히 밀면서 다이닝홀을 향해 걷다가 중간쯤 숨이 차다고 하며 그만 워커에 털썩 주저 앉는다. 조이스는 장모님에게 그럼 잠시 앉아 쉬라고 하고 나서 문패에 존이라고 적혀 있는 사람의 방에 들어가서 그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도록 도와주고 나서 다시 장모님에게로 왔다.

그때 내가 장모님이 앉아 있는 워커를 밀면서 다이닝 홀 쪽으로 가려 하자 조이스가 말렸다. 앉아계신 장모님에게 단호하게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방에서 다이닝 홀까지라도 워커를 걷는 것이 건강을 위해 좋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착하고 얌전하게만 보이던 조이스에게서 저런 직업적인 단호함이 나오다니….

검은 머리채를 두 갈래로 땋아 허리까지 내린 조이스의 건강한 체구 앞에서 장모님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워커에 의지한 채 천천히 다이닝 홀을 향해서….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나중에 또 들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모님에게 인사하고 나서 너싱홈 현관 쪽으로 가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장모님이 식사를 하려고 앉아있는 테이블 쪽을 보았다.

큰 글라스 저그로부터 어머님에게 물을 따라주는 조이스의 모습이 내 의식 안으로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앵그르의 작품, 샘의 그 풍만한 가슴을 한 여인과 오버랩되었다. 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갈증이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왔다. 샘과 갈증… 그림 속에는 세 개의 샘이 있었다. 하나는 여인이 샘물을 길어올린 샘이었고 또 하나는 여인의 두 손으로 든 물동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샘이었고 마지막 샘은 바로 그 여인 자신의 젊고 풍만한 몸이었다. 이어서 갈증은 희미한 고통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나의 예감이면서 동시에 둔탁하게 느껴지는 가벼운 통증이었다.

너싱홈 게이트에 도착하자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1… 9… 8… 4… #

덜커덩 하며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열렸다. 가장자리까지 단정하게 다듬어진 잔디밭이 끝나는 쪽에 작은 파골라가 있었고 그 안에 벤치가 있었다. 그 벤치에 앉아 있는 구겨진 몸을 하고 있는 헨리의 시선을 나는 등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질시와 분노와 회한의 시선을…. 바깥 세상을 향한…. 나는 어떤 감정이 가장 강한 감정인지 거의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어느덧 내 걸음은 도망치는 자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헨리로부터. 샘으로부터.

최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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