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건 이유가 없다 V

하늘이 무너져내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주무시다가 그대로 돌아가셨다. 내가 뉴질랜드로 떠나기 이십여 일 전이었다. 지금도 나의 뉴질랜드 이민이 어머니를 떠나게 했는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뉴질랜드로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 떠난 후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살아가야 할 길이 안개가 자욱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보았는지 둘째 형님이 어깨를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가라, 뉴질랜드로. 너 마음 편하게 가라고 어머니가 먼저 가셨나 보다.” 나는 형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둥지를 틀자고 마음을 정했다. 한국교민 대다수가 살아간다는 귀동냥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클랜드에 사는 교민은 2만여명이라고했다.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영어만 구사할 수 있는 나는 현지사회에 파고들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언어가 통하고 문화가 통하는 한국교민사회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학 재학중인 아들은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남겨두고, 고등학교 졸업한 딸과 아내를 데리고 한국을 떠났다. 떠나는 날 공항에 나온 둘째 형님에게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데 눈물이 돌았다. 가슴을 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형님을 다시 뵐 수 있을지, 설움이 목구멍을 채웠다.

기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낯선 땅에서 살아갈 길이 아득했다. 어디가 중심지인지, 교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딘지, 교민들이 종사하는 주 업종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사막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한달 여를 모텔에 머물자 주인과 말 길이 트였다. 한국인 모텔주인은 나 같은 얼뜨기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모텔주인의 소개로 자칭 이민안내자라는 한국인을 만났다. 그의 안내로 자동차도 구입하고 집도 장만했다.

이민자생활은 뭉텅이 돈 짊어지고 오지 않은 이상 살아가기에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언어나 문화의 차이는 현지사회에 들어서기에 힘겨운 장애물이었다. 거기에다 한국교민들이 운영하는 사업이란 것들은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한국교민들이 주로 운영하는 사업은 여행사, 건강식품판매, 작은 식당, 간판만 그럴듯한 슈퍼마켓이 주류였다. 나는 할 일을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 한숨으로 지샜다.

어느 날, 아내가 우연히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방송을 들었다. 아내가 “나이 들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의 성원을 담고 방송국을 찾아갔다. 아내의 성원 덕분에 라디오방송국에서 어린아이 같은 기자도 했고 PD도 했다. 투자해서 몇 년 사이에 다 털어먹었지만 국장도 했다. 나의 젊은 시절 꿈을 얼핏 맛본 것인가? 그러나 산다는 건 어디서나 가볍지도 만만하지도 않았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캠퍼스커플인 후배와 결혼해 내 곁으로 왔다. 아들도 현지사회에 발을 딛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기에는 시행착오의 아픔이 따랐다. ‘노가다’에 합류해 파이프를 짊어지고 건물 천장을 기어다니기도 했다.

딸은 아이 때부터 피아노와 함께 살았다. 딸은 달라진 세상에서 피아노를 닫았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홀로 거칠고 모진 세상 속을 방황했다.

나는 그런 아들 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나는 아들 딸을 꽃피우기 위한 거름도 되질 못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아들을, 피아니스트의 꿈을 꾸던 딸을, 나의 떠도는 세상 속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 죄인처럼 가슴 저렸다. 내가 아들 딸의 인생마저 힘들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감사하게도 세월을 견디며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한 아들은 의료제품을 취급하는 영국인 회사에서 당당하게 근무하고 있다. 딸은 한 사내의 아내가 되어 평온함 속에서 나날이 따뜻하다. 어느덧 아들 딸의 나이가 반백 년을 훌쩍 지났다.

돌아보면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쓸쓸하다. 80여년 세월이 덧없다. 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황혼이 나도 모르게 벌써 오래 전부터 내 곁에 와있다. 청각은 형편 없어졌다. 낮은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렵다. 나의 세상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잠자리에 들면 또 다른 내가 잔잔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인다. “차근차근 조금씩 떠날 준비를 해야 되는 거야.”

산다는 건 연극이라 했다. 사람들은 삶의 무대 위에서 제각각 맡은 역할이 있다고 했다. 나는 내가 맡은 역할에 만족하는가? 내가 맡은 역할에 충실했는가?

서산에 해지면 내가 받았던 내 삶의 대본을 덮어야 한다. 행복했든 불행했든 황홀했든 초라했든, 내 삶의 연극 무대는 머잖아 막을 내린다. 막 내린 무대 뒤에서 나는 ‘잘했어’라고 웃음지을 수 있을까.

더듬어보면 나의 날들은 맑고 푸르른 날보다 바람불고 비 내리는 날이 더 많았다. 때로는 죽고 싶을 만큼 외롭고 서러웠지만 눕지는 않았다. 바람에 밟혀도 일어서는 풀잎처럼 버틴 짧고도 긴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 날들을 나는 삶의 본능처럼 꿈틀대며 버텼을 뿐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 떠도는 구름처럼 세월만 흘렸다. 눈감으면 사는 것이 뭔지, 내가 뭔지, 나답게 사는 삶이 뭔지, 떳떳하게 사는 것은 또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나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왜 살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느 누가 그랬다. “사는 건 이유가 없다. 그냥 살아라.”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세상의 이치인가? 그래, 그렇다. 나는 그냥 살았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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