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한 외교관이 한국언론의 왜곡행태를 빗댄 ‘유머’가 있다. “예수가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발언한 것을 한국언론은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 던지라고 사주’라고 보도했다. 석가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대해 한국언론은 ‘오만과 독선의 극치, 국민들이 끝장내야’라고 썼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고 했을 때 한국언론은 ‘소크라테스, 악법 옹호 파장’라고 보도했다.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하자 한국언론은 ‘시저, 평소 주사위 도박광으로 밝혀져’라고 보도했다.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자 한국언론은 ‘이순신, 부하에게 거짓말 하도록 지시, 도덕성 논란 일파만파’라고 보도한다.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통일입니다’라고 하자 한국언론은 ‘김구, 통일에 눈이 멀어 민생과 경제 내팽개쳐’라고 보도했다.” 유머라고 하지만 씁쓸하다.

‘기레기’라는 단어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다. 이 단어는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등장했다. 당시 기자들은 취재경쟁을 벌이며 ‘아니면 말고’ 식의 오보와 ‘과장 보도’가 속출했다. 오보는 오보를 낳고 과장 보도는 본질을 훼손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거기에다 진영논리까지 끼워 넣으면서 대한민국 언론의 신뢰도는 형편없이 추락했다. 시민들은 그때부터 허위사실과 과장된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불렀다. 요즘은 이보다 더 심한 ‘기더기’라는 단어도 있지만 설명을 자제하겠다.

최근에 세계언론들은 코로나19와 관련해 팬데믹 (Pandemic 전세계 대유행) 공포 속에서도 침착하고 재빠르고 체계적으로 대응한 한국정부에 대해 찬사와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한국 보수정치인들과 언론만은 정부의 대처에 대해 가짜뉴스를 양산하면서 정략적이며 정파적인 공격에 집중했다.

비단 코로나19뿐만 아니다. 지난 4월 중순부터 떠들썩했던 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나 ‘사망설’도 그렇다. 소영웅주의에 빠진 같잖은 인간들이 ‘완전 식물인간’ ‘99% 사망’을 주장하자 수구언론과 보수꼴통들은 팩트체크 없이 호들갑을 떨면서 위기를 조장하고 정부를 다그쳤다. 헌데 김정은은 멀쩡했다.

라파엘 라시드 (Raphael Rashid)는 한국에서 9년간 살고 있는 영국출신 프리랜서기자다. 그는 한국의 정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외국인 기자의 눈으로 분석한 그의 기사는 영국의 언론매체에 실린다. 그는 “한마디로, 한국언론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한국언론을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솔직히 말해보자. 비단 코로나19뿐만아니라 일상적인 느낌인데, 한국언론은 형편없다. 한국의 ‘메이저언론’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관련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는 매우 심각한 주장을 했다. 헌데 그 정보의 출처는 한 개인 네티즌 유튜브 채널이었다. 이런 위기에서 익명 SNS가 출처가 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한국언론은 팩트체크가 없다. 팩트를 부풀린다. 복사, 붙여넣기가 성행한다. 소설의 냄새가 난다. 언론윤리가 없다”고 혹독한 평가를 했다.

그가 ‘한국언론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한말은 한국기자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건 또 ‘기레기’가 널려 있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정녕 한국언론에는 ‘기자정신’을 신조로 삼고 정의 진리 앞에 당당한 기자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인가?

언론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야 한다. 남이 써놓은 것, 그마저 다른 엉터리에서 베껴놓은 것을 짜깁기하고, 제 입맛에 따른 상황에 맞게 감성을 오도하는데 도가 튼 기자를 과연 기자라고 할 수 있을까?

오로지 패거리의 권력쟁취를 위해서 편가르고, 모략하고, 거짓말하고, 사기근성, 조폭 근성에 젖어있는 부정 부패한 조직 집단에 불과한 그들의 글 장난을 기사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이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것인가?

한국언론이 언제부터 이렇게 저질스러워졌는지 부끄러울 뿐이다. 특히 수구언론의 콘텐츠는 심히 역겹다.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절대 떼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21대 총선결과는 언론의 장난질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경고등임을 언론은 절감해야 한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Previous article코리아타운 특별기획 : 에너지 불끈! 으랏차차 체력보강!!
Next article뻔뻔트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