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

월요일 오전 8시 30분, 코트에 도착했다. 우편으로 받은 Jury Duty 출석 요구서를 보여주었다. 안내인을 따라 2층 대강당으로 가서 순서대로 주는 번호표를 받고 들어가니 100여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이미 들어와 꽉 차있다. 여기 저기 소음 속에 한 시간쯤 지나니 방송을 통해 번호가 호명되기 시작했다. 당첨(?)되면 계속 남아야 하고 안되면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얼마 후, 내 번호도 방송에서 나왔다. 방송이 끝나자 안내 직원이 50여명의 당첨자들을 인솔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인지도 모르는 법정으로 인도한다. 가끔 영화에서 보긴 했지만 실제의 법정엔 내 생애 처음 들어와 본다. 제일 앞 높은 자리엔 재판장이 앉아있는데 그가 쓰고 있는 모자는 하얀 양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 밑에 검은 가운의 젊은 보좌 판사가 앉아있다. 그 앞엔 재판장을 마주 바라보는 왼쪽 좌석엔 검은 양복을 입은 검사가, 오른쪽 좌석엔 재판장과 같은 모자를 쓴 법정 변호사가 앉아 있다. 그 뒤엔 4명의 직원들이 앉아 있다. 변호사 옆쪽으론 피의자가 통역사와 함께 앉아 있다. 우리 일행이 다 들어오니 문이 닫히고 재판장이 한참이나 이번 배심원의 선출과정과 배심원 의무 등을 설명한다. 이중에 이유가 있어 Jury Duty 면제를 받으려면 앞의 재판장에게 설명해야 한다. 듣고 난 재판장은 바로 Excused or Not Excused 한다. 10여명이 앞에 나갔는데 한 명만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면제되었다. 나도 나가서 영어가 잘 안 된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가지 않았다.

 

또다시 재판장의 설명이 있은 후, 젊은 보조 판사가 사각 상자 속에 손을 넣어 이리 저리 섞다가 한 장씩 뽑아 배심원 12명의 번호를 모두 호명했다. 뽑혀도 그만 안 뽑혀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조금 기대하기도 했는데 싱겁게 내 번호는 불리지 않았다. 호명된 12명이 Jury box(배심원 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조금 후, 젊은 판사가 12명을 한 명씩 호명하니 그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면 변호사는 피의자와 상의하여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면 자리에 앉고, 변호사가 Challenge(기피)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배심원석에서 내려와 돌아간다. 그렇게 해서 12명중 5명이 내려왔다. 또 다시 한 사람씩 번호가 호명 되었다. 첫 번째,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한다. 둘째도 끄덕, 셋째 때는 Challenge한다. 다시 셋째, 넷째 모두 끄덕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번호가 호명되었다. 무심코, 백 팩을 만지며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불린 그 번호는 내 번호였다. 깜짝 놀라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피의자와 상의한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한다. 이렇게 하여 나는 12명의 배심원 중 한 명이 되어 배심원 석에 앉았다.

 

한 달 전쯤, 참석 안 하면 2200불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통지서를 받고 벌금이 무서워 잊지 않고 참석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당첨되어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강력 범죄 재판의 배심원 석에 앉게 되었다. 이곳에선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모든 논의는 Jury Room (배심원 실) 에서만 해야 한다는 등의 주의사항을 한참이나 들었다.

 

법정 옆 문으로 연결된 배심원 실에 12명이 모여 앉았다. 각자의 앞엔 커다란 검은 바인더와 명찰이 놓여있다. 명찰엔 법정번호와 배심원 번호가 부여되어있다. 이제부터 12명은 번호로만 불린다. 내 번호는 00-0이다. 조금 후, 점심이 배달되어 왔다. 오늘은 모두가 샌드위치로 나왔다. 내일부터는 본인의 요청대로 점심이 제공된다. 커피와 티와 다과 등이 준비되어 있다. 각자의 핸드폰은 직원이 수거하여 보관하고, 그 날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갈 때 찾아갈 수 있다.

 

오후 2시, 첫 재판이 시작 되었다. 우리가 입장했다. 입장할 때 피의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는 것 같다. 우리가 배심원 석에 모두 앉으니 피의자도 앉는다. 재판장의 사건 개요 설명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2 주간 예정의 재판이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라고 한다. 재판은 재판장이 하는 것이 아니고 12명의 배심원이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갑자기 무거운 느낌이 확 다가온다.

 

내가 고국이 아닌 이곳 호주의 법정에서 재판 상식도 없이 하루에 106불 30센트 배심원 수당을 받으며 재판에 참여하고 Guilty!, Not guilty! 라는 최종 평결을 해야만 한다. 아니, 내가 무슨 권리로 한 사람에게 유죄!, 무죄! 판결한단 말인가? 아까 재판장 앞에 나아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에 온몸이 뻑적지근하다.

 

처음 올 때에는 벌금 안 내려고, 재미 삼아, 경험 삼아 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는 사태가 꽤 심각해져 가고 있다.

 

 

장석재 (수필가 /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 1996년 계간 <창작수필> 신인상 수상 / 2012년 제14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상 / 저서: 수필집 ‘둥근달 속의 캥거루’ / 그림동화책 ‘고목나무가 살아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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