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慾)과 침묵(見)

어떤 상황에 몰입된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 (emotional stress)는 해소될 수 있지만 듣는 사람의 불편 (emotional stress)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몰입된 상태가 해소될 때까지 침묵이 필요할 것이다.

대화가 힘들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스트레스 예방법’이다 하지만 묵언수행이란 만만치 않은 노력이 전제된다. 범부 중생임을 스스로 볼(見) 수 있다면 넘기 힘든 태산이라 할 순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행복한 삶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함을 알고 있을 뿐, 얼마나 실천하는가 따지는 것도 탐욕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루 중 아내와 가장 많이 함께하는 시간은 저녁을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거나 길게 누워 TV를 볼 때다. 문제는 드라마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는 나만 홀로 자주 눈물을 흘린다는 점이다. 정치 또는 사건 등의 뉴스를 보면서 불편해지면 궁시렁거리기도 한다. 그러다 얼굴이 붉어지고 열 오름을 느낄 때쯤 육두문자와 함께 화를 낸다.

그런데 아내는 나와 정반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거나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다. 물론 육두문자도 쓰지 않는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며 일희일비하지 않는 경이로움에 반해 결혼도 했지만, 평생 함께한 과정을 보면 백전백패, 가끔은 정말 정 떨어지게 하는 참 냉정한 여성이다. 그래도 여전히 흉내 낼 수 없는 장점을 소유한 아내와의 결혼은 잘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참고로 아내는 묵언수행을 하는 여자는 아니다.

작은 아들과 둘이 호주 이민 왔을 때였다, 어머니는 캔버라에 하우스와 자동차를 아들 명의로 사주셨다. 그 덕에 시드니 캠시에 이사 올 수 있었고, 안정된 직장을 유지하면서 호주 이민의 기틀이 이민 십 년 만에 만들어졌다.

이스트우드에 이사 온 지 여덟 해 넘은 어느 날 ‘어머니의 노년을 모시게 될 아내에게 부부 공동의 집 명의를 해주지 않으면, 빈 껍데기 아내 대접을 받는 것이니 이혼하겠다는 캠시 집에서의 선언에 굴복해 공동명의로 해준 것을 후회한다’는 내 일기장을 보고 아내가 시비를 걸어왔다.

극한 감정 유발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짧은 침묵을 통해 나는 차분히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수시로 매 순간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표현 장소가 일기장이고 지극히 사적 공간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면서 일기를 쓰는 사람도 있나? 앞으로도 그런 내 감정을 치료하고 다독이고 정화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할 때는 이보다 더한 일기를 쓸 것임이 확실하다. 다시는 남 (아내, 부모, 자식)의 일기를 보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만약 우연이라도 (또는 호기심에) 보게 된다면 그 내용에 대해 어떤 것 (생각, 언급, 판단)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면 인간의 매 순간 감정변화의 표현은 그 글을 쓰는 사람조차도 정확히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진심 어린 ‘이혼’이란 말은 아홉 해 전 그 선언이 유일한 최초의 발언이었다”고… 그리고 침묵(見)했다. 긴 세월 나 같은 사람과 살아준 아내의 행복을 위해, 정말 신중하게 결정할 지도 모른다는 초라한 경고(泣訴)를….

오래 전에 아들을 통해 불교를 접하면서 종교 아닌 마음공부 수단으로 심취하고 있었다. 특히 침묵은 말의 본질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된 영세자로서 카톨릭 불교도 (Catholic Buddhist)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항상 범부 중생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평온함을 얻은 수준이라 보살은 언감생심이다. 내 한계가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생긴 대로 살 뿐, 욕심을 지켜볼 뿐, 움켜쥘 생각은 없다. 순조롭게 흐르는 물이면 고마울 뿐, 격랑이면 어떤가?

“어, 잘못하면 죽겠네…” 할 뿐이다. 그 묵언의 덕으로 이렇게 차분하게 말할 공덕이 조금 생겼다는 느낌이다. 말은 상대를 향해 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게 훨씬 필요하다. 결국 소리가 불필요하니 묵언이다.

사실 TV를 보면서 낄낄거리고, 씩씩거리고, 찔끔거린다면, 그 순간의 감정과 본성이 그렇다는 것 아닌가? 부부, 가족 그리고 지인간에 발생하는 모든 현상과 감정의 본성도 그러할 것이니 그냥 바라보고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 부부의 일상은 시자 (媤字) 관련만 제외하면 매우 평온한 편이니 그나마 참 고마울 뿐이라 생각하고 있다. 부부 서로의 친족은 천륜 (天倫) 아닌가? ‘고맙(힘들)게 감당(포기)’ 하는 선택을 할 뿐이다. 언젠가 침묵(見)에 익숙해지면 죽은 귀신이 되어도 관조하는 재미가 솔솔 할 듯하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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