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것…

어린 시절, 엄마 손 붙들고 동네사람들의 결혼식장에 갔던 기억들이 새롭습니다. 그 시절엔 결혼식 답례품으로 찹쌀떡세트, 카스텔라, 타월세트, 양산세트… 뭐, 이런 걸 줬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물론,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먹었던 갈비탕도 크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늘 반가웠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제 친구나 친지들의 결혼식이 주를 이뤘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청첩장들이 몰려와 허리가 휠뻔한(?) 적도 꽤 여러 번 있었지만 결혼식장에 간다는 건 늘 즐거웠습니다. 이후로는 그들의 결혼으로 태어난 새 생명들의 백일이나 돌을 축하하는 자리가 이어졌고 친구 부모님의 회갑 또는 칠순 잔치도 우리를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일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결혼식이나 돌 잔치, 칠순 잔치에 비해 장례식은 그 느낌과 무게가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궂은 일일수록 더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자리에는 가급적 빠지지 않으려 합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장인어른의 마지막 모습이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모두 모였음에도, 출가한 큰딸부부가 도착할 때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우리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임종을 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을 가까이에서 느껴보지 못한 저였지만 그날 제 품에 안겨 평화롭게 마지막 순간을 맞는 장인어른을 보면서 죽음에 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됐던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드물게는 저보다 어린 사람의 죽음도 겪어야 했습니다. 시드니에 와서 제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헤어짐은 13년 전 불의의 사고로 마흔 한 살의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가족과 다름 아니었던 우리회사 회계사였습니다. 유능하고 올곧고 마음 따뜻했던 그의 죽음은 그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새치기 하기 없기.’ 제가 가끔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지만, 그리고 굳이 100세 시대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너무 일찍 죽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농담처럼 주장하는 ‘85세 이전 사망금지’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아유… 좋은 모습 보여야 하는데… 와줘서 고마워요… 나는 이제 편안해요…” 병상에 누운 채 우리 일행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눈을 맞추던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분의 두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병실을 나서는 우리 일행의 뒤로는 작은 흐느낌이 이어졌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의 투병생활 끝에 호스피스병동으로 자리를 옮긴 그분은 의사의 진단대로 3주만에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났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요…”라며 평온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는 그분의 위로예배와 조문 그리고 장례예배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늘 시드니산사랑 멤버들과 함께 선두그룹을 형성하며 맨 앞에서 걷던 그분은 이제 겨우 예순 여덟 살입니다. 아내밖에 모르던 사랑꾼 남편과 가족들 특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두 손녀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던 그분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을 알지 못하는 막내손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많이 아리게 했습니다.

“내 주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는 걸 보면 왠지 우울하고 무서운 마음까지 들 때가 있어요.” 얼마 전 들었던 선배지인의 고백(?)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가 갖는 공통의 생각일 것입니다. 굳이 ‘삶이라는 게 참 덧없다’는 말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한번은 맞아야 하는 죽음… 사는 날까지는 욕심내지 말고 건강하게, 즐겁게 그리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런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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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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