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손녀사위 생일이라 가족이 모두 모였다. 아내와 며느리가 준비한 음식을 즐기면서 서로서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나는 식구들 대화하는 풍경만 봐도 편안하다.
첫째 손녀사위와 둘째 손녀사위 모두 백인이다. 아들내외, 손녀, 손녀사위들은 영어로 대화한다. 손녀들은 할매 할배와는 한국어로 대화한다. 그리고 제 남편들에게 통역한다. 이민 올 때 가족은 네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드니에 살고 있는 딸 내외를 포함해 모두 열한 명이다. 식구들 대화도 한국어뿐이었는데 손녀들이 성장하면서 영어가 끼어든 거다. 내 삶에서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낯선 땅에 발 디디며 살길이 아득해 한숨짓던 날들이 바로 엊그제 같다. 그 세월은 속된말로 뭐하게 버틴다는 ‘존버’였다.
낯선 땅에 와서 처음 부딪치는 고통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였다. 더불어 쓸쓸함과 외로움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방황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저지른 이민이라는 짓거리가 과연 바른 선택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나의 선택으로 내가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지만 남편을, 아버지를 무조건 따라와야 했던 아내와 자식들의 방황을 생각하면 그 또한 아픔이었다.
거기에다 유교문화에 젖은 나를 분노케 한 것은 윗사람에 대한 존중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사고방식으로는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 싸가지 없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였다. 말투는 그렇다 쳐도 인사하는 것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운 채 ‘하이’였다.
그렇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랜 세월 유교문화가치관에 살아온 나의 불편한 모습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정체성의 방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존과 평등을 익히고 체면과 눈치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배웠다.
내가 허둥대는 동안 아들 며느리는 적극적으로 현실에 적응해갔다. 현지인과 어울려 시행착오를 겪고 현지문화에 적응해가면서 언어도 생각도 현실적으로 변해갔다. 한국사람을 만나면 한국문화에 벗어나지 않은 행동을 했고 현지인을 만나면 그들의 문화에 어울리는 행동을 했다. 그런 행동이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아들 며느리는 현명했다.
호주 시드니에 자리잡은 딸과 사위 역시 현지문화에 적응해 불편함 없이 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딸 내외도 많은 혼란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현지사회에 자리잡은 거다. 미안하고 흐뭇하고 고맙고 자랑스럽다.
손녀들은 유교문화와 삼강오륜이 뭔지 모르고 전혀 관심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기찬 날들을 보내고 있다. 첫째 손녀는 수의사 고참이다. 동물가족들에게 최고 인기 있는 수의사다. 손녀사위는 남아공화국 출신으로 컴퓨터프로그래머다. 전혀 문화의 차이 없이 오순도순 잘 살아간다. 그들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표정엔 언제나 밝음이 넘쳐난다.
둘째 손녀는 힙합댄서다. 힙합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디즈니랜드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픽업돼 촬영하느라 늘 바쁘다. 손녀사위는 농구선수로 3점 슛터다. 뉴질랜드농구협회 소속으로 사무도 본다. 사무원으로 농구선수로 바쁘게 활동한다. 그들 역시 문화의 차이나 갈등 없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 넘친다.
셋째 손녀는 교육대학교 재학 중이다. 2년후면 프라이머리스쿨 (Primary School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우리가족 중에서 한국어가 제일 어눌하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세 손녀 모두 사고방식이 완전한 서구문화다. 그래도 예절은 동양적이다. 아무래도 가풍은 본받게 마련인가보다.
내가 이민 와서 악착같이 버티면서 31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14년전부터 나라에서 연금을 받는다. 마누라나 나나 받는 연금은 서로 간섭 없이 완전 독립채산제다. 제각기 나름대로 살아가는데 그렇게 부족하진 않다. 세금을 많이 낸 것도 아닌데 꼬박꼬박 연금을 받으니 뉴질랜드정부에 감사하고 좀 미안하다.
우리부부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지들 결혼하고 2년남짓 독립해 살다가 합친 후 지금까지 25년여를 함께 산다. 서구사회에서는 생각조차하기 힘든 모습이다. 아들 며느리에게 고맙다. 특히 며느리에게 감사한다. 세상사 무슨 일이든 안방마님이 삐치고 뒤틀면 사랑방양반이 아무리 소리쳐도 되는 일이 없는 거다.
그렇다고 옛날 한국의 빈한한 부모들처럼 자식에게 마냥 빈대 붙어 살지는 않는다. 마누라나 나나 마음 편하고 싶어 받는 연금에서 각자 알아서 생활비도 보탠다. 그러면서 술도 사 마시고 취미생활도 즐기면서 산다.
나는 가끔은 흡사 ‘총 맞은 것처럼’ 정신 없이 단행한 이민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 이었는지, 더불어 나의 선택이 내 자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지를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의 이민이 자식들의 삶에 어떻게 인식될지 궁금하다. 방황과 혼란과 어둠과 고통을 가져왔다고 인식 될지, 아니면 밝음과 여유와 평화로움을 가져왔다고 인식될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내 자식들은 행복함을 온몸으로 보듬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한 인간이 태어나고 자란 땅을 등지고 새로운 땅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도박이며 모험이다. 그것이 나의 고통과 어둠으로 끝난다면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어떤 종류이든 견디기 힘든 고통이 이어진다면, 그건 나의 잘못된 선택이며 나의 아픈 인생이다.
고국을 떠난 나의 모험이 잘한 것이었는지 잘못한 것이었는지, 솔직히 나는 모른다. 이 삶이 다하면 그때 알까?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