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술타령 ①

단 한잔도 술을 못 마시는 내가 술꾼의 아내가 된 것은…

한 여자가 커다란 이민가방을 들고 호젓한 길가에 서 있었다. 동네는 나무들이 많아 대낮에도 으슥하다. 지나가던 자동차가 여자 앞에서 차를 세운다. 건장해 보이는 호주 남자가 유리창을 내리고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묻는다. “마담, 도와 드릴까요?”

 

01_전날 밤, 남편은 음주운전으로 3개월 운전정지 처분을

여자는 기겁을 해서 이민 가방을 질질 끌고 도망치듯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꼭 어쩌자는 것이 아니었다. 속 상할 때마다 커다란 이민가방을 다시 꾸려보는 것이 그 여자의 습관이었다.

여자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 든 옷가지들을 모두 꺼내서 목욕탕에 넣고 욕조 꼭지를 튼다. 욕조 가득 물이 차오르자 예쁜 나들이 옷들이 흐물흐물 물속에서 흔들린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여자는 서글픈 감정으로 노래 한 구절을 떠올렸고 이내 꿀꺽 삼켜 넘긴다. 호주에서 공부 잘하는 두 아이들, 술만 안 마시면 너무나 성실한 남편, 눈물이 똑… 흘러 떨어진다.

전날 밤에 남편은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걸려서 3개월 운전정지 처분을 당했다. 운전을 못하는 여자는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진다. ‘개구장이 어린 두 아들은 주말마다 얼마나 실망이 클까! 쇼핑센터가 먼 우리는 이제 어떻게 3개월을 살아야 하나.’

“술이 다 깼었는데…” 미안해서 자꾸 변명하는 남편과 더 다퉈봐야 별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동네 앞 사거리 라운드 어바웃 (Round about)에서 새벽에 경찰에게 딱 걸린 것이다.

그는 집 앞 한적한 라운드 어바웃을 밤새도록 뱅글뱅글 돌고 있었던 것이다. 자꾸 돌기만 하는 남편을 지나가던 경찰이 발견하여 경찰차에 태워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02_그렇게 훌륭한 라운드 어바웃에서 경찰에게 걸리다니

애꿎은 차는 죄도 없이 어느 골목길에서 버림을 받았을까… 경찰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 후부터 라운드 어바웃은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특별한 화제가 되었다.

그곳에서는 서로 운전을 조심하고 양보를 하기 때문에 사고가 잘 나지 않는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우리는 지역마다 볼 수 있는 이 라운드 어바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라운드 어바웃에는 신호등도 없고 교통순경도 없었다. 차가 한 방향으로 돌면서 교차로 안에 먼저 진입한 차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라운드 어바웃의 기본규칙이며 오른쪽에게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

라운드 어바웃에 익숙해지면서 참으로 안전한 교통제도라는 것에 감탄하게 되었다. 신호등을 대신하는 이 라운드 어바웃은 규칙과 자율이 어우러진 서구식 합리주의의 극치가 아닌가!

신호등처럼 기다리지 않아 시간과 연료의 낭비도 줄여주고 신호대기의 짜증도 덜어주고…. 기계적 통제보다 인간의 자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더 유익한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훌륭한 라운드 어바웃에서 경찰에게 걸리다니 내 남편은 바보! 엉터리!

 

03_남편은 호주의 페인트 공이다. 그리고 술을 좋아한다

남편은 호주의 페인트 공이다. 그리고 눈치 챘겠지만 술을 좋아한다. 대학 때 운동권에 속했다는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남편은 착하다.

처음 맞선을 볼 때 좀 허약해 보이긴 했지만 그 순한 눈빛이 좋아서 평생 속 안 썩고 살듯하여 선을 본지 몇 개월만 에 그냥 후딱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자마자 탄탄한 직장 버리고 수속 중이던 호주로 이민을 가자고 고집을 부리고 보채기 시작하면서부터가 문제였다.

청천병력 같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간간히 다투기는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잘 버텼는데 연년생인 둘째 아이를 낳을 즈음 덜컥 시어머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지 않는가!

에고… 혼인하여 3년 안에 집안 어른이 돌아가시다니… 쯧쯧… 남들이 얼마나 수근거릴꼬. “동지암 보살님이 그러는데 네 남편이 방랑벽을 타고 나서 어차피 선산은 인연이 없다 하니 네가 이 참에 김 서방 소원이나 들어 주는 게 어떻겠노?”

“…..” 청춘에 혼자되신 친정 어머니는 어려울 때면 동지암에 들려 정성을 드리며 마음을 의지하는 분이셨는데 큰일을 치르고 친정에 들른 내 눈치를 보며 넌지시 물으셨다..

 

04_술통을 차기 위해 페인트 통을 찼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결국 우리는 이민가방 두 개만 더 늘려서 도망치듯 그의 큰 누나가 살고 있는 호주로 훌쩍 떠나왔다. 호주에 온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특별한 직업도 기술도 없으니 우선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일년 넘게 서성거리다가 어느 날 한인촌에서 우리는 우연히 선배 형을 만났다.

“보소 보소, 니, 혹시 장수 아이가?”

“어? 준복이 형 아니십니까”

“왜 아니라, 니가 여기 웬 일이고? 어이? 살다보이 시드니 바닥에서 이누마 장수를 다 만나고…이게 꿈이가 생시가?”

말로만 듣던 운동권 선배를 시드니에서 만나고 보니 돌아가신 시어머님 말씀이 맞긴 맞나 보다. “우리 장수가 뭔 운동권을 넘나들겠노. 멫날 메칠 집구석을 안 들어와가 언날 학교를 찾아가 봤드니 핵교 한귀퉁이서 포스터를 그리고 앉았는기라. 날 보더니 도망가삐리대. 그것도 전민련이라 카드라.”

그 형의 소개로 연줄연줄 사람들을 알아 고향입네 동문입네 주말마다 술타령을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페인트공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술통을 차기 위해 페인트 통을 찼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뿐더러 뼁기통 (밥통)을 차고 이 동네 저 동네 일을 하러 다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방랑자 몰골이니 팔자땜은 틀림 없으렷다.

“페인트? 페인트라는 것 자체가 원래 예술 이니까… 호주에서 사용하는 페인트는 오일 베이스하고 워터 베이스인데 대부분 인테리어용은 워터 베이스 즉, 수성 페인트를 쓴단 말야… (주춤) 쉽긴 하지, 하지만 너무 뻑뻑하면 물을 타서 써야 하니까 마음에 드는 색감을 내기는 만만치 않거든. 절대로 쉽지 않아요.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오해라구…”

 

05_술만 취하면 히죽거리며 그렇게 예술가 타령을…

한동안 페인트 하던 선배를 열심히 따라 다니며 배우더니 이젠 독립해서 컨트랜터로 직접 일을 따서 하니까 보수도 괜찮고 또 운동권 때 포스터를 그리던 인연으로 밥벌이를 하게 된 것을 자못 감격스러워 하더니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술만 취하면 히죽거리며 그렇게 예술가 타령이다.

덕분에 나도 두 아들을 키우면서 생활전선에 나가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만하다. “여보, 오늘 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박수를 많이 받았어. 페인트공도 공부는 좀 하거든.”

언젠가는 저녁을 먹으면서 멋쩍게 그날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여 한참 웃었다. 그 즈음 그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페인트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낮에 페인트를 칠하다가 우연히 창 너머 교실에서 선생과 학생들이 수학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칠판에 적어놓은 수학문제를 학생들이 하도 못 풀어서 선생님이 힘들어 하길래 보다 못해서 창문을 두드리고 손을 들어 대신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박수를 쳐주며 ‘페인트공 최고’라고 칭찬 많이들 해주더만….” 하여튼 가지가지다. 그날 그는 분명히 점심 후 맥주 한 캔 했으리라.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편리한 술을 못 마실까? 단 한잔도 술을 못 마시는 내가 술꾼의 아내가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글 / 그라시아 (글벗세움 회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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