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뿔, 멋은…

역시, 버스에서 내리는데 뒷통수가 뜨끈뜨끈하다. 상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에 흠뻑 빠졌다. 시간들인 보람이 있다. 낮에는 덥겠지만 오늘 아침 최저 기온은 영상 7도. 30년 전의 호주에선 양로원의 환자들을 병원으로 이동시키던 기온이다. 대강 입으려다가 시티로 나간다는 핑계로 멋지게 차려 입었다. 입성이 날개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 두툼한 오버코트를 여미며 시계를 보았다. 8 시35 분. 아직 영사관 문 열기엔 이른 시각. 카페에서 커피와 크로상을 먹고 올라 갈 시간이 충분했다. 앞에 선 여성의 뒷태가 예쁘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마침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뀐다. 운이 좋다. 문득 운수 좋은날이 떠올랐다. 누구 글이더라. 생각하는 순간 손에 있어야 할 서류가 없다. 버스에 놓고 내렸다. 아뿔싸.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옆에 가던 청년이 팔을 잡아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며 거듭 괜찮냐고 묻는다. 힘없이 웃어보이며 상황을 판단했다. 시티의 출근길. 시드니에서 가장 혼잡한 퀸빅토리아 빌딩 앞. 뛰어가면 버스를 잡을 수 있다. 원더우먼이 부러웠다. 냅다 뛰었다. 고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열흘 후, 변호사 앞에 놓여야 하는 서류. 시민권과 이름 변경 서류에 공증받아 가려고 영사관 가는 길이었다. 모두 원본이다. 시민권 원본을 다시 받으려면 적어도 한달 이상 걸린다. 호주 공무원들의 느려터진 업무진행을 감안하면 6개월 이상 걸릴것이다. 이름변경 서류는 급행료를 낸다해도 기간 안에 받기 힘들다.

상속 서류 마감일이 아버지 사후 6 개월. 6월21일까지다. 머리 속의 톱니바퀴를 돌리는데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탔던 버스 번호가 보인다. 뒤이어 도착한 버스다. 마침 신호등에 섰다. 행인보호용 펜스가 가로막혀 버스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손을 휘휘 내저으니 버스기사가 저 앞의 정류소를 가리킨다. 아이고. Geroge St를 건너야 하는데. 눈앞에 빅토리아여왕이 동상 위에서 매서운 눈으로 쏘아본다. 그래, 어쩌라구, 신호등이고 뭐고 뛰어야 하는데…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다시 달렸다. 한겨울 코트 안으로 땀이 줄줄 흐른다. 심장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버스는 내가 도착할 때 까지 문을 열고 기다려 주었다. 숨이차고 눈물이 흘러 말문이 막혔다. 버스에는 승객 너댓이 앉아있지만 아랑곳없이 하소연했다. 그는 친절하게 131500 번호로 연락하란다. 이 바보야. 그건 나도 알아. Ryde bus depot 넘버를 알려달라고 하니 그 넘버라고 고집 피운다. 아닌데. 전화기를 바꾸며 지워버린 번호가 떠오르지 않는다.  알려 준 번호로  전화를 하자 영혼없는 목소리가 열심히 안내문을 읽는다. 길 건너로 갔다. 하이드팍을 돌아 다시 라이드 쪽으로 갈거야. 지난 30 년을 라이드지역에서 터줏대감으로 살아왔다. 라이드 지역을 중심으로 운행하는 버스들의 통제권은 라이드 버스종점이 갖고 있는것을 익히 알고 있다. 직접 찾아가는 수 밖에. 운 좋게 아침 출퇴근 시간에  배정된 차 라면 10 시에는 돌아 온다는 것도 안다. 그곳에서 직접 그 버스기사를 호출 할 수도 있다.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그렸다. 될거야. 찾을 수 있을거야. 그런데…,만약 누군가가 집어 갔다면. 불길한 상상이 꼬리를 문다. 남편이 계속 전화를 한다. 받을 힘이 없다.

 

눈 앞에 라이드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 잃어버린 서류 얘기를 했다.아무 말하지 말라는 손짓이다.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뭔가를 쓴다. 내가 원하던 라이드 종점 전화번호다. 시계는 9 시 1 분이다. 전화번호 8 자리를 누르는 손가락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다. 바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울음이 터져나왔다. 앞자리에 앉은 여성이 휴지를 건네준다. 버스기사도 거울을 통해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흐릿한 눈물 속에서 희망이 보였다.

출발장소에 이어 버스 넘버와 도착시간 및 장소를 불러주었다. 전화기 속에서 시내를 돌아다니는 버스 기사들이 요구하는 소리들이 생생히 들렸다. 한참을 부르고 끄는 소리들이 이어지더니 드디어 내가 탔던 운전자와 통화가 된 듯 싶다. 지금 운전 중이어서 확인 할 수 없다는 소리가 들리며 기다리라는 응답이다. 나와 통화 하던 그 목소리가 이름과 분실물의 내용들을 자세히 물었다. 15 분 후 전화를 다시 하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그냥 전화기를 열어두고 싶었지만 나 처럼 다급한 사람이 전화 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얌전히 전화를 끊었다.

버스는 달링하버를 지나 고가 위를 시원하게 달린다. 정말 오랫만에 보는 시내의 풍광이지만 내 맘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다. 참으로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다. 다음주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연기 할 수도 없는 상황. 마감날이 정해져 있는 일정들. 석달 이내에 받으면 되는 서류들…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게으른 나를 질책했다.

전화기가 진동하자 내 마음에 떨림이 울려왔다. 라이드 종점이다. 전화를 받자 내용물 확인이 시작되었다. “이름과 서류 색깔. 서류의 내용들이 맞는것 같은데….” 그 버스가 10시 반에 돌아온다는 얘기에 웃음이 흘러나오려 했다. 버스를 타고 종점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로 전화를 끊었다. 버스 기사는 백미러로 빙그레 웃으며 브이자로 오늘의 미션을 축하한다.

 

버스 종점에 도착하니 시계는9 시 47 분. 작은 쪽문 너머에서 금발의 여성이 매끄럽지 않은 영어로 투박하게 명령한다. “분실물 회수? 10시 30분 부터 오후 4시 이전까지 운영하니 이따 와.”  뭔 소리. 지금 버스 올텐데. 팔짱을 끼고 쪽문 옆으로 섰다. 투박한 목소리 주인이 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턱으로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직장을 갖고 있는 그녀가 감히 납세자를 턱으로 조정해? 속으로 열 받았지만 얌전히 말을 들었다. 지금의 그녀는 ‘갑’이고 나는 ‘을’ 이기 때문이다. 추웠다. 햇살은 포근한데 춥다. 근처 카페로 향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마음을 추스렸다. 10시 25분. 다시 버스 종점 사무실로 향했다. 그 사이 종점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버스들이 가득 차있다. 쉬는 시간을 갖는 버스기사들로 종점 옆길은 왁자지껄하다. 저멀리 분실물 안내센터가 보이는데 누군가 손짓한다. 뛰었다. 손에는 내 서류가 들려있다. 턱으로 나를 움직이던 그녀가 밝게 웃으며 서류를 건네주었다. 너 오늘 운 좋아. 그녀가 하는 말에 그럼, 운이 좋은거지. 투박했던 목소리가 맑아져 있다. 답하는 내 목소리도 밝았다. 이제 나는 갑으로 위치가 변경 되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영사관으로 향했다. 이번엔 서류를 손에 꼭 쥐고 앉았다. 멋진 오버코트 위에 놓인 서류 봉투는 쉽게 미끄러진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녔더라면 흘리지도 않았겠지. 멋부리느라 손바닥 만한 가방을 들고 다니던 똥멋이 한심하다. ‘늙으면 그저 한데 모다 담고 다녀야 혀.’ 인생선배들이 하던 얘기가 새삼 진리로 다가온다.

영사관에 가서 번호를 뽑아 앉았다. 예전 같으면 오래 걸렸을 텐데 바로 불렀다. 운이 좋다. 공증받으러 왔어요. 서류를 내 놓자, “어, 호주 정부 서류는 호주 정부에서 공증 받으셔야 해요.”

 

개뿔. 멋부리는 탓에 롤러코스트를 탔던 하루의 오전 시간이 지났다. 운수 좋은 날의 해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다.

 

 

장미혜 (캥거루수필문학 동인·수필문학으로 등단·수필집: 오십에 점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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