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집

아내가 시장에서 사 온

둥근 호박에 칼집을 내달라고 한다

작게 칼집만 내주면 혼자 자를 수 있다고 한다

호박은 쉬이 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칼집이 나자 이내 갈라지고

숭덩숭덩 썰려 나갔다

 

칼집이 칼을 열망하는 것인가

칼이 칼집을 좇아가나

 

지도자들의 굳건한 믿음의 얼굴에도

칼집이 하나 둘 생겨나

지난여름 무른 호박처럼

썰려 나가고 있는 오늘

 

나서는 안 되는 것들 어디에

나는 자국을 내고

잘려 나가면 안 될 어디로 칼을 들이밀어

따뜻한 문들이 닫히고 있는 것인지

한참 맛이 들 뉴사우스웨일즈 New South Wales의 가을

집사람이 건네주는

단호박 맛이 시큼하다

 

김오 (시인·문학동인 캥거루 회원·1993년 호주<동아일보>신년문예 시 당선·1994년 <시힘> 동인 8집에 세 편의 시를 실으며 작품활동 시작·시집: 캥거루의 집, 플래밍턴 고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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