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정치

고국을 떠나온 후 강산이 두 번도 훨씬 넘게 변했다. 이쯤 됐으면 벌써 오래 전에 고국이라는 추상명사는 내게서 낯설어질 때도 된 거다.

나는 애국자도 아니고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더불어 국제화 시대니, 지구 공동체 운명이니 하는 말들도 나에겐 듣기에 버거운 언어의 유희다. 나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꿈틀대는 생명체일 뿐이다.

그런데도 고국의 하늘을 등에 업고 땅에 몸뚱이 붙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월에 궁금함을 떨어버리지 못한다. 왜일까?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 잘난 척, 말들도 많지만, 내게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 뿐이다. 어쩌면 이 수수께끼는 내가 죽는 순간에야 풀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의 21대 총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고국을 떠나면 고국의 ‘정치’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한 건데 그게 잘 안 된다. 고국에 살 때는 애써 정치에 무관심하려고 했었다. 선거 때가 되면 ‘그 놈이 그 놈이고 모두 백성 팔아먹는 도둑놈들’인데 뭔 관심이냐며 정치를 혐오했는데, 고국 떠나 나이 자꾸 퍼먹어오자 이상하게 관심이 가고 마음이 쓰인다. 그것도 한국국적을 버린 것이 2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이 또한 수수께끼다.

어쨌든 21대 총선 후보자 총 등록인원이 1118명이다. 평균경쟁률 4.4:1이다. 헌데 놀라지 마시라!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 인물들 중 전과자 비율이 36.8%다.

‘국민을 위하여’라고 소리치면서 나선 열 놈 중 네 놈 가까이가 전과자다. 5년간 세금 떼먹은, 체납자비율은 14.3%다. 국민의 4대의무 중 하나인 국방의무를 기피한 인물도 16.9%에 달한다. 정의를 부르짖고 국민을 위한다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이번 총선은 준연동형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됐다. 연동형비례대표제란 간단히 말해 정당이 얻은 표의 비례만큼 의석을 얻는 정치제도다. 지금까지는 승자만이 의석을 독차지했다. 이걸 고쳐서 패자가 되더라도 국민으로부터 얻은 표의 비례만큼의 의석을 얻는 거다. 한국의 준연동형비례대표제는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제한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득표비례만큼 의석을 얻는다고 하니 ‘정치 모리배’들이 춤을 춘다. 너도 나도 정당을 만들었다. 거대 정당도 제1당이 되겠다고 ‘형제 정당’ ‘자매 정당’까지 만들었다.

비례대표의석을 얻겠다고 난립한 정당이 35개가 됐다. 이 때문에 투표용지는 48.1cm에 달한다고 한다. 당 명칭도 해괴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국가혁명배당금당’이란 것도 있다. 정치가 희화화 됐다. 이들 정당이 내세운 비례대표후보는 312명으로 총47석의 의석경쟁률은 6.6:1이다. 정상적인 국가의 정치행태인지 걸리버 (Gulliver)의 난장이 나라 정치행태인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전부 아니면 전무, All or Nothing이라는 이분법적사고 (二分法的思考)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준연동형비례대표제는 꼼수정치로 타락하고 말았다. 오직 제 패거리들 권력 쟁취를 위한 음험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치하는 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하여’라고 나불대지만, 그건 위선이다. 속내는 권력 쟁취다.

정치하는 그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현충원을 방문해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선열들 앞에 묵념을 하고 방명록에 국가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 어쩌고저쩌고 글을 남긴다. 이 모두 정치 쇼다. 나는 이들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저 위 만주벌판이 생각난다.

까마득한 날부터 신라, 백제, 고구려로 시작해 셀 수도 없이 오랜 세월을 편갈라 싸우다가 종국에는 한반도의 2/3에 해당하는 우리의 땅, 광활한 만주벌판까지 남에게 빼앗겨버린 이 어리석은 민족의 편가르기라는 고질병은 언제쯤 돼야 고쳐질 수 있을까.

며칠 후면 고국국민들은 선거를 치른다. 선거란 민주주의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제도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돼있다.

선거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로서 한 사회가 그 조직을 구성하고 특정한 공식적 결정을 내리는 수단 중의 하나다. 국민들의 올바른 투표로 꼼수정치를 박살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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