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 일지

목이 매캐하다. 허리 디스크가 신호를 보낸다. 벌써 10주째, 주 6일 일하고 있으니 몸이 성할 리 없다.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폭주하는 전화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망하는 고객들의 메시지, 집 이자를 갚지 못하자 은행들이 요구하는 서류들을 부탁하는 삭아버린 메아리들. 2019 년 말부터 몰아치던 산불이 호주 경제를 흔드는 돌풍이었다면 코로나 사태는 경제를 초토화하는 쓰나미다. 자연의 테러다. 이 전쟁에서는 항복문서를 받아 낼 상대가 없다.

엊그제 일요일,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몸이 파김치 같았다. 지난해 3월, 코비드19로 인해 일상이 멈춘 이후, 모든 사람에게 주는 정부 보조금 등록과 지원으로 일반 회계업무는 마비되어 왔다. 호주 대부분의 회계사들과 마찬가지로 고객들의 이번 달 지원금 신청도 열 나흘이 지난 오늘에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이틀째 감기 증상은 낫지 않는다. 아침에 출근하며 목이 칼칼했다. “코로나가 아닐까”말하는 순간, 앞에 서서 커피를 마시던 동료가 고개를 돌리며 일어난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순간 ‘어쩌면 코로나?’ 코로나에 걸린 것에 대한 불안이 아니다, 전파자로 지목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동료의 뒷모습에서 읽었다. 어떻게 하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컴퓨터를 켜 두고 나온 것은 기억났다. 내 이메일의 비밀번호까지 컴퓨터 아래에 적어두었다. 어쩌면 더 오래 자리를 비울지 모르니까.

 

캔터베리 병원으로 향하다가 가정의에게 전화했다. 의사 소견서를 가져가야 한다며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병원으로 들어오지는 마시고 도착하시면 전화주세요. 그런데, 마스크 있나요?” 차에는 마스크를 쌓아두고 있다. 다행이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내가 모든 사람의 격리 대상자가 되다니….’ 격리된 채 사투를 벌이다가 배웅 없이 먼 길을 떠난 수만 명의 영혼들에게 미안했다. 조문보다 장례식이 먼저 진행되는 죄 없는 그들. 시트에 둘둘 쌓여있던 모습들. 24시간을 넘기기 전에 소각되어야 한다며 입던 환자복 그대로 이중 삼중의 백에 담긴 채 하얀 뼛가루로 남겨지고 있다. 남은 우리가 죄인이다.

가정의병원 밖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바람이 차다. 기온이 떨어진 것 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차다. 코비드 진료소는 캔터베리 병원이 아니라 사무실 코 앞에 있었다. 적어도 지난달엔 그 앞을 두 번이나 지났는데.
문을 열려니 손잡이에도 바이러스가 묻어 있는 것 같다. 장갑을 가져오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가방을 열자 지난 영수증이 있다. 그것으로라도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구겨진 종이를 버릴 쓰레기통이 안 보인다.
“어떻게 왔나요?”

“코비드…” 부연 설명을 달기도 전에 그녀의 차가운 말이 꼬리를 자른다.

“앉아서 기다리세요.” 건조한 음성이다. 마치 내 입에서 나오는 침 한 두 방울에 감염될까 두렵다는 말을 침묵으로 설명하는 듯 하다. 코까지 올라온 마스크에 안면 덮개까지 쓴 검사원은 나를 멀리 돌아 옆 검사실로 들어간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모두 바이러스가 붙은 것 같아 의자에 앉지 못했다. 내가 이럴진대 그녀는 더하겠지. 겨우 목부터 감싼 푸른 비닐 앞치마로 옷에 들러붙는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을까. 검사원은 집으로 돌아갈 때 겁나지 않을까? 내 걱정보다 그녀의 허수룩한 전투장비를 보고는 냉랭한 음성에 불끈 했던 내 성질머리가 미안해졌다.

계속 서 있으려니 다리도 댕긴다. ‘어… 나 정말 코비드야?’ 불안하다.
“들어오세요.” 환자가 나간 후 한참 동안 소독한 후 나를 부른다. 이름도 확인하고 생년월일.. 꼬치꼬치 일주일간 행적을 적는다. 다행히 집과 회사 이외에는 돌아 다니지 않았다. 목에서 면봉으로 채취할 때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코는 좀 깊게 들어 갈거 예요.”
살랑살랑 흔들리는 면봉을 코에 넣는다. 그만 들어갔으면 싶은데 자꾸 더 깊게 넣는다. “코 안이 막혔네요. 왼쪽에 다시 넣을게요.” 눈물이 나면서 새큼하다.

“코 안 더 깊게 넣어야 하는데. 그래도 채취는 했으니 되었어요. 한국 분이세요?”
그러고 보니 영어 억양이 우리와 같다, 간호사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내게 휴지를 뭉텅이로 뽑아준다. “조금 그래요. 힘드셨죠.”
검사소를 나서는데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한국의 드라이브스루 검사 방법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하의 날씨에 야외에서 검체를 채취하던 그분들의 손과 발은 꽁꽁 얼었지만 전세계에서 선두주자로 새로운 검체 채취방법의 선구자 적 노력에 감사했다. 이렇게 보균자 일지 모른 사람이 오고 가는, 환기도 잘 안 되는 실내 검사소는 죽음의 바이러스가 좀더 쉽게 들러붙을 것 같았다, 열심히 턱을 들게 하고 코 속을 닦는 노고. 어디서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이런 검사소에서도 느끼게 한다. 제대로 인사도 않고 총총히 빠져 나와 캠시의 검사원에게 미안했다. 커피 한 잔 갖다 주고 싶어도 내가 혹시 감염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을 접었다.

춥다.
결과는 이삼 일 걸린다던 조금은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있다. ‘어제 사무실 다녀간 사람도 세 명인데 다 기록해 두었고. 오늘 업무 중 급한 것은 없지…’ 당장 음압병실로 입원해야 할지도, 폐가 생각보다 빨리 굳어져 다음주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내게 맡겨둔 고객들의 서류를 걱정하는 내 오지랖이 미웠다.
‘이제 집에서도 자가격리 해야 하네.’ 내가 오염원이라는 생각이 들자 긴장되었다.

‘쉬자.’ 방문을 닫았다. 혼자다.

이제 자야 하는데. 시간이 많아지면 하겠다고 밀쳐 둔 일들이 방안 그득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캄캄한 밤하늘은 나의 이런 맘을 아는지 바람을 몰아 창문에 쏟는다. 잠은 포기했다. 밤은 더디게 갔다.
‘내일 저녁 미팅은 어쩌냐… 취소할 수 없는데…’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했다.

아침이 되었다.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유일하게 외부로 통하는 길이다. 필요한 게 없느냐는 메시지가 온다. 전화 선으로 바이러스가 옮겨간다고 생각하는지 모두가 메시지로만 연락한다. 입안이 말라간다.

이탈리아에서 수백 개의 관이 성당을 가득 채운 사진들이 속속 올라오고 한국에선 한여름이 시작되어 마스크가 얇아져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마스크조차 쓰기 싫어 턱에 걸쳤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고 보니 유서작성을 몇 년 전에 하고 추가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급히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가는데도 받지 않는다. 꼬리를 무는 생각과 사후를 정리해야 하는 현재의 나. 그런데 전화가 왔다. 콜록대며 본인도 코로나검사를 받아 자가격리 중이라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웃음이 나오는 그녀가 부러웠다.

“유언장? 커피나 마십시다.”

낼 모레. 누가 먼저 결과 받는지 늦게 결과 올리는 사람이 커피값을 내란다. 코비드 검사를 했을 뿐인데도 벌써 관을 옆에 두고 종부성사를 받은 사람처럼 불안해 하는 내게 정신 차리라는 얘기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강한 정신력이 놀라웠다. 낮잠 속에서도 도망 다녔다.

첫 번째 검사 후 두 번을 더 했다. 할 때마다 음성으로 나왔지만, 결과를 메시지로 받을 때까지 두려움이 스멀거린다. 2 차에 이어 3차 폭발이 이어지고 있다. ‘만약 코로나에 걸렸다면….’ 세 번의 검사는 세 번의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멈추어 있는 지금이 외로움에 고통스럽지만 적어도 타인에게 옮기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으로 외출을 줄이고 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자. 지구인 친구들아.’

 

 

장미혜 (캥거루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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