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ma의 눈

숙박비 비싼 Cooma 겨울 스키장을 피해 여름철 Mt. Kosciuszko의 캠핑지를 찾았다.

케이블카를 내리고 큰 나무도 골짜기도 없는 키 작은 나무들만 납작하게 옆으로 퍼져 있는 언덕에서 등정을 시작했다.

시야도 트이고 시원한 바람이 상큼하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웅장하고 아기자기한 한국의 산과는 전혀 다른 낯 설음이 호기심으로 올라왔다.

얼마나 됐을까? 거대한 덩어리 산의 뾰족한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하는 단순함이 오랜 시간 지속됐다.

그늘도 없고 변화도 없는 일정한 풍경의 지루함이 반복됐고 몸은 점점 지치고 있었다.

산 정상이 보이면서 더욱 그랬다.

호흡은 턱에 걸렸고 걷는 것은 분명한데 눈앞의 정상이 그대로 멀리 서 있는 것으로 느껴진 것은 거대한 능선의 착시현상 때문이었다.

휴식은 포기를 의미하기에 느려도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는 데 집중했다.

턱까지 올라온 호흡과 다리근육의 뻑뻑함으로 뭉그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가쁜 호흡과 함께 하얀 눈을 부분적으로 뒤집어쓴 펑퍼짐한 정상 (2,228m)을 맞이한 감회는 기막힌 절경과 관계없는 눈에 대한 반가움이 들이닥쳤다.

“힘들었지, 어서 와!”

시원한 눈의 미소가 들리는 듯 친숙한 그리움과 갑자기 대면한 것이다.

“와~ 눈이네!”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달려가 움켜쥔 두 손을 하늘로 흩뿌려 올렸다.

모두가 공감의 미소를 보내는 듯했다.

한 순간 고국의 눈 속 추억들이 하늘에서 거친 호흡과 함께 “펑~ 펑~” 내려오고 있었다.

 

6학년 소년 시절 만났던 눈은 언제나 구겨지고 아파했던 슬픔과 따뜻함을 떠올리게 한다.

가출 한 달 만에 이리의 중식당을 탈출해 전주 집으로 가는 철길을 걷고 있었다.

깜깜한 밤이 되었다.

하늘에선 주먹만한 눈들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고 몸은 점점 심각하게 얼어가고 있었다.

어린 마음이라 해도 “아, 이러다 죽는구나…” 생각했을 때쯤, 아득히 먼 곳에서 이름 모를 기차역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곳까지 도착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대합실의 문을 여는 순간의 “드르륵~!” 소리는 “어서 와!”하는 따뜻함으로 60년 지난 지금도 진한 감성으로 남아있다.

아무도 없는 역. 조개탄 난로 옆 긴 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열차와 사람들 소리가 났다. 그리고 기차는 전주에 도착했다.

역사 앞 꼬치집에서 외할머니를 위한 참새 꼬치 몇 개를 사 들고 집의 문 앞에 도착했다.

“어서 와!” 커다란 눈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선 난리가 났다. 부엌에서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고 따뜻한 쌀밥을 새로 지어 먹이고….

당시의 주식은 시래기죽, 호박죽, 콩나물 죽, 비지, 풀대죽… 등이었고 쌀밥은 명절, 제사, 생일에나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가출을 이유로 가족 중 한 명이 홀로 하얀 쌀밥을 먹고 있었다.

 

24년 후. 완벽한 가장 시절에 만난 눈은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황홀한 추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겨울철만 되면 태백 눈썰매장과 설악산 권금성 등의 눈 속에서 아이들과 뒹굴었던 7년.

행복했던 춘천을 떠나 신림동에서 정말 바쁘게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말 새벽이면 관악산에 올라 연주암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두세 개의 국기 봉을 잡고 하산해 동네 목욕탕에서 일주일 피로를 풀며 체력을 다졌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서울 생활에 적응하려는 절박한 방편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시간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했었다.

어느 날 6학년 3학년 두 아들이 아빠와 함께 등정할 기회가 있었다.

하산하면서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하얀 눈송이들이 서울대 근처의 평지에선 세상을 온통 뒤집으며 새하얀 설국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시작한 아빠와의 눈싸움은 한 순간 아름다운 기억 속 영상의 추억으로 남았다.

눈이 오면 쉽게 녹아버리는 서울 도심의 주택가와 전혀 다른 세상.

큰놈이 눈 뭉치를 던지며 외친 말이 시도 때도 없이 지금도 왕왕거린다.

“내 손에서 눈이 나간다!” 그랬다 우리는 모두 눈이 되었고 서로에게 눈을 뿌리며 만들어내는 설국을 숨 막히게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께했던 순백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호주로 이민 온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문제는 그 동안 겨울철에 쿠마에 가면 볼 수 있는 눈을 보러 갈 생각 없이 그저 그리워 만 했다는 점이다.

그랬다. Cooma의 눈을 본 순간 고국 산하의 설경들… 겨울철 그곳을 소환은 했는데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직도 낯 설은 이민자, 계절도 반대인 호주의 눈은 그리움을 깊게 할 뿐이었다.

숨어있던 향수병이 튀어나온 거다.

떠난지 20년 넘었으니 지나간 52년은 잊으라는 자신의 강요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3년 차 코로나 세상을 겪으면서 꼼짝 못 했던 입출국이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또 무슨, 더 험악한 세상이 오기 전에 미루어두었던 일들을 해야만 한다.

갈수록 점점 내 맘과는 다른 몸 상태를 느끼고 있다.

운신을 힘들어하시는 92세 어머님이 항상 내 삶의 좌표 아닌가.

자식들 승인 없이는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으신 어머님.

내 마음과 능력을 믿지 못하면서 나를 위해 자식들이나 호주 요양사들에게 모든 걸 의지할 수는 없다.

아버지의 고향 선산에 마련한 가족 묘 비석들이 “어서 와!” 하며 기다리고 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 집으로 향하는 슬픈 소년의 마음이, 설국 속 아이들과 행복했던 아빠의 마음이… 그곳에 그냥 있다.

Cooma의 눈이 속삭이고 있다.

서두르라고….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전직 버스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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