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지우기

법정(法頂)스님 (1932~2010)은 ‘선택한 가난의 삶’을 살면서 침묵과 무소유의 철저함으로 이 시대의 가장 순수한 영혼으로 회자된다.

그가 생전에 말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

법정은 한 보살로부터 받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길렀다. 혼자 사는 거처 라 살아있는 생물이라고는 법정과 난초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이름도 어지러운 비료를 구해오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었고, 겨울에는 실내온도를 내리곤 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중요한 일이 있어 멀리 길을 떠났다. 한낮이 되자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그때서야 법정은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떠나온 것을 알았다.

허둥지둥 돌아와보니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법정은 난초에게 너무 집착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깨달았다.

며칠 후 한 처사가 놀러 왔기에, 법정은 선뜻 그의 품에 난초를 안겨주었다. 헤어짐의 섭섭함보다 비로소 얽매임에서 벗어나 날아갈 듯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법정이 쓴 산문 <무소유>의 줄거리다.

나에게는 라디오방송국을 운영했던 흔적으로 가요, 팝송, 가곡 등 CD 1000여장이 남아있었다. 방송국을 접고도 내려놓기가 아까워 10년넘게 붙들고 있었다. CD를 볼 때마다 옛추억이 떠올라 감상에 젖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 CD를 듣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유튜브를 뒤져 듣는다. 전문가도 아니니 음질을 따질 수준도 아니다. CD도 거의 대부분이 옛 것들이 됐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지만, 사용하지도 않는 지나가버린 것에 얽매여 돌아오지 못할 것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어느 한날, CD뿐만아니라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움켜쥐고 쌓아놓기만 한 내가 가지고 있는 무거운 것들을 그만 내려놓자는 생각이 들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조금씩 CD를 내다버렸다. 다시 읽지도 않으면서 쌓아놓은 책들, 신지도 않으면서 신발장에 늘어놓은 구두들, 운동화들, 모두를 재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입지 않으면서 걸어둔 바지들, 양복 저고리들, 길고 짧은 티셔츠들도 즐겨 입는 몇 벌만 남겨두고 모조리 의류함에 갖다 넣었다. 비우고 나니 외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얼마 전에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을 옮기느라 이삿짐을 챙겼다. 살면서 추억이 서리고 아깝기도 하고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해서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은 살림살이는 꺼내놓고 보니 엄청났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틈틈이 버리고 남은 내 소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도서관에 기부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남은 최근에 발간된 서적 몇 권, 꿈결처럼 살아온 흔적이 판화처럼 새겨져 있는 액자 세 점, 정리하고 남은 사진첩 한 권으로 작은 한 박스가 됐다. 양복 세 벌, 와이셔츠 세 벌, 넥타이 세 개, 속옷 티셔츠 바지 운동복 서너 벌, 양말 운동모자까지 모조리 쓸어 담아 또 한 박스가 됐다. 그 동안 슬금슬금 내려놔 많지 않다고 생각한 나의 흔적이라는 것들이 그래도 두 박스나 됐다.

한 켤레씩만 남겨둔 골프화 테니스화 등산화 운동화 검정구두와, 테니스라켓가방과 골프클럽까지 트렁크에 싣고 나니 그게 내 짐의 전부였다. 새삼스럽게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법정스님은 일생 동안 버리고 버리다 육신의 옷까지 버렸는데 내게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는 탐심이 맘속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무소유는 얽매이지 않는 거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가진 걸 내려놓는 것은 흔적지우기다. 무소유는 흔적을 지워가는 내려놓기다. 먼 길 떠날 때 걸치고 갈 옷 한 벌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편안하다는 작가 고(故) 박경리의 말처럼, 나는 남아있는 흔적들도 차근차근 내려놓으려 한다. 불필요한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삶도 행복해진다고 했다. 끝내는 스스로 지울 수 없는 흔적도 있겠지만, 해마다 해가 가듯 그렇게 지워보려고 한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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