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빵과 단호박

식탁 위에 호빵 세 개와 단호박 죽이 달랑 올라온 게 눈에 보였다.

순간, 귀찮아서 대충 준비됐다는 생각에 화가 올라왔다.

“이게 뭐야?”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질렀다.

“뭐긴 뭐야, 아침이지!”

“당신, 이거 정말 너무 하는 것 아냐?” 톤이 높아졌다.

“왜! 뭐가 불만인데? 그거면 충분한 식사지. 아침에 찹쌀 넣고 팥 넣고 얼마나 걸려서 만든 건데 도대체 뭘 원하는데?” 하며 아내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뭐긴, 난 밥하고 김치지. 당신이 지겨워하는 것 같아 참았을 뿐인데, 앞으론 내가 살림할게, 나한테 넘겨!”

밥해주는 걸 엄청난 권력으로 티를 낸다는 치사하고 아니꼬움이 맺혔던가? 해선 안 되는 말을 부지불식간에 뱉은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바로 말부터 나왔다.

 

“오, 그래! 잘됐네. 알아서 내일 제사도 한번 잘 해봐!” 한다.

“뭘 잘해 봐, 가르쳐 줘야지!” 했더니 “뭘 가르쳐 줘? 난 누가 뭘 가르쳐 줘서 한 줄 알아? 당신도 혼자 알아서 해!” 한다.

큰일 났다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물러설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책 없이 암담했다.

빵과 토스트로 아침이 바뀌면서, 그 동안 40년을 밥만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지겹기도 했겠다.

빵으로 준비하는 게 더 힘들고 복잡해 보이기도 해서 참 고생도 사서 한다 했지만 은퇴한 삼식이인데 매사에 조심해야지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식품점 호빵 세 개와 1불짜리 호박죽’을 보고 평정심을 잃었던 것이다.

 

내일은 아버지 제삿날이다.

이민 와서도 20년 동안 설, 추석, 기일을 거른 적이 없었고, 캔버라 동생 집에 가 계시는 92세 어머님은 항상 참석하셨다.

그런데 이번 제사부터 날 보고 알아서 하라니,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 앉았지만 한편으론 배신감에 오기도 생겼다.

그래, 상차림에 필요한 음식 준비를 옛날엔 남자들이 했다는 기록을 언젠가 본 기억이 나기도 했고, 이번 기회에 한번 해보지, 뭐.

인터넷 정보시대에 못 할 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물론 앞으로의 식사를 포함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해 볼 마음도 먹었다.

그 첫 실천으로 그 동안 한 번도 안 했던, 아내가 말없이 해왔던, 오후면 도착하실 어머님 방의 침대시트를 갈고 있었다.

이곳 저곳 이불장을 뒤져 침대시트를 찾아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아내가 손님방 이불을 준비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속도 없이….

조금 전까지의 그 결기는 어디로 가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있는데, 어머니 모시고 12시에 캔버라에서 출발한다고 동생이 카톡을 보내왔다.

인간이 참 간사하다. “운전 조심하고. 언니가 너희 둘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구나.” 가벼운 환영의 답신을 보냈다.

시드니에 와도 이런저런 이유로 오빠 집에서 자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언니도 네 잠자리를 준비하는 마음은 항상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일타쌍피, 도랑치고 가재 잡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는데 이럴 때도 해당될 것 같다.

갑자기 다른 때보다 제사상과 아침상 차림이 풍성했다.

오래간만에 동생부부도 자연스레 손님방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도 함께했다.

다음 날 아침식사 후, 전 가족에게 보여주듯이 나 홀로 설거지를 다 하며 접근도 못 하게 했다.

모두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침마다 이를 반복하고 있다.

큰 인심 쓰듯 어쩌다 몇 년에 한번 하던 걸 계속해서 해주니 아주 좋아한다.

요즘 부부 대화가 아주 부드러워졌다.

못 해줄 이유가 없다.

결혼 40년 넘도록 그 동안 이걸 왜 몰랐지?

호빵과 단호박이 깨달음을 준 밥이 되었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전직 버스운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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