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새끼? 내 새끼?

예닐곱 살 때쯤으로 기억됩니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의 유명사찰, 봉원사 근처였던 것 같은데… 하여튼 그 시절 우리가 살던 집은 제법 가파른 언덕을 한참 올라야 했던, 꽤 높은 산동네(?)에 있었습니다. 해질녘… 저만치 아래에 아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꼬마가 있는 힘을 다해 냅다 달리기 시작합니다.

빛의(?)속도로 언덕을 뛰어내려오는 꼬마를 발견한 아빠도 정신 없이 언덕을 마주 뛰어오릅니다. 행여 아들이 넘어지기라도 할세라 아빠는 있는 힘을 다해 아이를 향합니다. 이윽고 아빠와 아들은 언덕배기 중간쯤에서 뜨겁게 얼싸안은 채 해후의(?) 기쁨을 나눕니다. “어이구,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줄 알겠네….” 옆에서 엄마가 웃으면서 한마디 합니다.

어릴 적 제 아버지는 사업가 소질이라고는 없는 뛰어난 발명가였습니다. 그 옛날, 석유다리미도 만들어냈고 주택용 방범장치, 민방위훈련 경보기 등도 모두 아버지 손을 거친,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발명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허구한날 발명에 몰두하다 보니 어머니나 제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속된 말로 곰처럼 재주만 열심히 넘고 돈은 뙤놈 대신 사기꾼 양아치들이 모두 챙겨가는 바보짓이 반복됐습니다. 뛰어난 기술력은 있었지만 사업자금이 없었던 아버지는 윈윈을 위해 그들과 회사를 공동으로 이끄는 방식을 택했지만 돈은 번번이 그 사람들 몫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 말처럼 저는 아버지를 ‘몇 년 만에’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힘들게 일궈놓은 회사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양아치들이 사기까지 치고 도망치는 바람에 아버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돼 초등학교 4학년이 돼서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겁니다.

어찌됐든, 이런저런 이유들로 우리와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던 아버지는 제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른바 객사를 하셨는데 희한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딱 하루, 까치 한 마리가 우리 집 뒷마당에서 하루 종일 서성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때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미국 NBC 시트콤 ‘코스비 가족 만세’의 다정하고 익살스런 아빠 빌 코스비 같은 아빠가 돼야겠다는 게 저의 꿈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찌질함을 벗어나지 못해 아내와 아들녀석 그리고 딸아이에게 다정한 남편, 자상한 아빠가 돼주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자식한테는 그렇게 해주지 못하다가 뒤늦게 ‘자식의 자식들’에게 사랑을 쏟게 된다고 하는데 저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됐습니다. 딸아이를 통해 만나게 된 에이든과 에밀리가 지금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같은 이스트우드에 살면서도 지 엄마아빠가 움직이지 않으면 만나기 힘든 녀석들이 가끔씩은 많이 보고 싶고 그리워집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페이스톡으로 얼굴을 보며 통화를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직접 만나 살을 맞대며 함께 하는 걸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며칠 전, 오랫동안 참고 참았다가 에이든 학교 끝날 시간에 맞춰 그 앞으로 갔습니다. 녀석의 학교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긴 하지만 웬만하면 자제하려 애를 씁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들의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데 에이든이 우리를 향해 쏜 살 같이 달려오는 게 보였습니다. 저 어릴 적 언덕배기까지는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넘어질까 얼른 녀석에게 뛰어갔습니다. 녀석이 “할아버지!” 하며 와락 안기는 순간 엔돌핀이 팍팍 솟아오름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녀석은 우리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향했습니다.

녀석이 조금 더 크면, 가끔씩 에이든 에밀리와 함께 2박 3일 아니, 1박 2일이라도 여행이나 캠핑을 하는 것… 다리 떨릴 때 말고 가슴 떨릴 때 꼭 해보고 싶은 우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물론, 내 새끼가 아닌 남의 새끼이니만큼 지 엄마아빠의 동의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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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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