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렝이…

멀리서 봐도 저 분이 맞는 듯싶었습니다. 제가 길을 건너자 그 분도 벤치에서 일어나 저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그렇게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지난주 수요일 한낮, 이스트우드호텔 앞에서 두 손을 맞잡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멀리까지 오시게 해서…. 오시느라 고생은 안 하셨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커피를 한 잔 하실래요, 아님 맥주를 한잔 하실까요?” 저의 질문에 그 분은 얼른 “그럼 낮술 한잔 할까요?” 라며 반색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오후 3시 20분까지 두 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호텔 펍에서 안주도 없이 저그(Jug)에서 맥주를 따라 마시며 마치 오랜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조관제 회장… 올해 일흔 한 살인 그 분은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중 한 분으로,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한국카툰협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4월 초부터 부인과 함께 시드니 딸네 집에 와있는데 우연히 코리아타운을 보게 됐고 그 속에서 저를 발견하고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여성지 <여원>이라는 고리… 그것이 그 분과 저를 엮어줬습니다. 그 분은 제가 여원 사람이 되기 훨씬 전에 여원, 신부, 직장인 등 여원이 발행하는 잡지들에 만화와 일러스트를 넣었던 인연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제게 보낸 이메일에서 자신의 만화와 일러스트 카툰 등을 코리아타운에 무료로 제공하고 싶고 코리아타운 광고주의 사업장이나 역할에 대한 짧은 글과 캐리커처를 게재하는 탐방기사 등을 자원봉사로 하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끝부분에 “이곳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있는 동안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제가 가지고 있는 작은 재능으로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서 무례하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는 7월 초순에 귀국할 예정이며 딸네 집에서 묵고 있고 특별한 일이 없어 시간이 많으니 대표님 시간이 편할 때 연락 주시면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곧 만나 뵙도록 하겠다고 회신을 했지만 바쁨 반, 무성의 반으로 시간이 훌쩍 지났고 어느덧 그 분이 시드니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뒤늦게라도 만남을 갖고 이해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에 다시 연락을 취했는데 그 분은 “친절한 배려에 감사 드리며 아는 이 없는 할배 만화가가 시드니에서 이런 인연으로 대표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게 돼 고맙습니다”라는 회신을 줬습니다.

여원에서 젊음을 불살랐던(?) 이야기부터 시작해 맨땅에 헤딩하기 식 이민 초기의 어려웠던 시절, 코리아타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시간만 충분하면 밤을 새워도 끝이 안 날 이야기들이 풀어졌습니다.

그 분은 맘씨 좋은 시골 할배 같은 미소로 연신 “헐렝이야, 헐렝이…” 하며 저를 격려해줬습니다. 헐렁헐렁한 사람, 상대하기에 만만한 사람을 이름. 사전에 풀이돼 있는 ‘헐렝이’에 대한 정의입니다.

남의 부탁이라면 거절할 줄 모르면서도 정작 자기 아쉬운 소리는 못하는 사람, 동료 혹은 선후배에게서 얻어 먹기보다는 술 한잔이라도 사주는 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 사기를 치는 것보다는 사기를 당하는 게 더 쉬운 사람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는 헐렝이….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분은 그런 사람처럼 보였고 그 분 또한 저를 그 비슷한 부류로 여기는 듯싶었습니다.

매일매일 수많은 만남들이 이뤄지지만 그날 가졌던 생면부지 ‘헐렝이와의 만남’이 유독 진하게 남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이 도착하기 몇 시간 전 카톡으로 날아온 ‘안녕하세요? 조연우라고 합니다. 오늘 아빠 (관자, 제자 쓰십니다) 만나신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빠 사진 하나 보내 드립니다’라는 메시지에서도 또 다른 헐렝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 한국 행 비행기를 타는 ‘조관제 헐렝이’를 훗날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그 분과 함께 밤새 술잔을 기울여봐야겠습니다.

**********************************************************************

김태선 tonyau777@hot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Previous article현명한 비즈니스 구매 8단계 조치
Next article김치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