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외교

퇴근길 한국 식품점에 장을 보러 갔더니 식품점 앞에 푸른 잎이 싱싱하게 달린 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통통하게 살집이 좋은 배추도 매장에 가득하고 새우젓까지 준비되어 있다.

시드니의 겨울 날씨는 한국의 늦가을 날씨와 같아서 제대로 김장철 느낌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추 품귀현상이어서 배추 한 통에 7불이었는데 이제 반값이다. 탐스러운 배추를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며칠 전 이미 2박스 분량의 김치를 담갔는데 아들과 딸에게도 담아 주려고 배추 2박스, 깍두기와 동치미 담을 무 스무 개를 챙기니 쇼핑카트에 한 가득하다. 이 정도 양이면 한동안 김치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겠다.

호주에 살면서도 여전히 입맛은 한국식이라 김치 없는 밥상은 단 한 끼라도 서운하다. 나는 늘 사람 속에 북적이고 살다 보니 서울에 살 때도 김장을 100포기씩 했다. 뒷마당에 김장독을 묻어놓고 먹을 때마다 김치를 꺼내려면 조금 귀찮긴 하지만 생생한 맛이 달랐다. 한겨울에 눈 덮인 장독 뚜껑을 쓰윽 문질러 눈을 털어내고 엎드려 김치를 꺼내려면 커다란 항아리에 내가 빠질 것만 같았다.

살얼음이 사각거리는 동치미는 그 맛이 일품이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김치찌개 하나면 밥 한 그릇 뚝딱하는 남편의 식성은 그나마 반찬 솜씨 없는 내게 다행이다. 김치볶음밥을 해도 따로 김치가 있어야 하고 김치로 비빔국수를 해도 따로 김치를 먹어야 할 만큼 우리 집 식구들은 김치가 주식이다 보니 어쩌다 사서 먹을라치면 감당이 안 된다. 김치를 통마다 가득 담고 나면 부자가 된 듯 마음도 든든하고 걱정이 덜어졌다.

이민 초기 영어도 서툰데 가게부터 차려 고생하던 시절 기억이 난다. 가게 앞에 마주 보이던 점포에 중국 아줌마가 있었다. 처음엔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가게를 가만히 건너다보고 있다가 잘 팔리는 물건이 있으면 얼른 자기네도 가져다 팔곤 했다. 그러곤 속으로 찔리는지 아는 체를 못 하고 뚱한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당연히 나도 곱게 볼 수가 없었다. 인접 거리에서 같은 종류의 물건을 팔 수 없는 건 쇼핑센터의 규칙이다. 장사하는 기본에서도 벗어난다 생각하는데 그녀는 그런 점을 일체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옆 가게 사람을 시켜 자기가 사 온 것이 어떤 김치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김치를 좋아하는 중국인이라는 걸 내게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나도 이렇게 너하고 통하는 것도 있다는 의미로 그 동안의 불편함을 화해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너도 김치 좋아하니? 그래 담에는 내가 담근 김치 맛보게 해줄게…’라고 했더니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전에 친정 집 옆에 살던 월남인 가족 루 엄마는 김치를 담그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역시 서툴러 밥 먹다가도 아이가 김치 달라고 운다며 종종 얻으러 오곤 했다. 이웃에게 김치를 먹이는 건 엄마한테서부터 전해진 김치 외교다.

김치를 먹는 한국인에게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사실 외국인이라도 김치 맛을 한번 본 사람은 그 맛에 빠져버린다.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권 사람뿐만 아니라 매운맛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은 김치를 좋아해서 한국식품점에서 단골로 사서 먹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마도 나 같은 한국 아줌마들 때문에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은 그 맛에 길들어 나중엔 꼭 사서 먹게 되는 것이 아닐까? 러시아 사할린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사할린 동포들의 영향으로 한식을 좋아하고 김치를 직접 담가 먹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생각난다. 이웃들과 음식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된 일이라 생각한다. 누구든 한번 먹기만 하면 빠져 버리는 김치 사랑! 낯선 땅에서 말이 서툴다 보니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그 보충을 한 셈이다.

김치를 잘 담가서 식구들을 먹이는 거로 건강한 생활도 하지만 김치를 수단으로 친구 사귀는 일도 괜찮은 일인 듯싶다. 어젯밤 늦게 절인 배추를 오늘 아침 내내 만들어 통마다 담아 놓고 나니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다.

 

김미경 (수필동인 캥거루 회원·수필집: 배틀한 맛을 위하여·

berala-ajoom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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