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카포 가는 길 ②

떠난다는 것! 그것은 꿈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고, 설렘일 수도 있고, 환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절망일 수도 있고, 좌절일 수도 있고, 설움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떠남이 어떤 것들일까 생각했다. 돌아온다는 것도 역시 같다. 어떤 것들을 안고 돌아올 것인가.

테카포 (Tekapo)엘 가려면 그가 살고 있는 오클랜드를 떠나 크라이스트처치 (Christchurch)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가야 했다.

뿌연 안개를 헤집으며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공항 가는 길은 소리 없는 외로움이 가슴을 후볐다. 바람에 못 견뎌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메마른 나뭇잎도 없었고, 주름진 얼굴에 흰 수염 듬성듬성한 초췌한 얼굴의 쉴 곳 잃은 나그네가 허겁지겁 먹고 바람결에 놓아버린 빵 봉지도 없었다.

희망과, 꿈과, 평온이 숨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든 ‘삼포 (森浦) 가는 길’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길 떠나는 빈털터리 사내와 정처 없는 술집 작부가 켜켜이 쌓인 한 (恨)과 설움을 눈으로 뭉쳐 서로를 향해 내던지며 눈밭 위에서 웃고 뛰며 허둥거렸다는데, 테카포 가는 길 위엔 심술궂은 바람에 지는 벚꽃처럼 풀풀 흩날리는 눈송이도 없었고, 새빨갛게 입술 칠한 함께 갈 한 많은 작부도 없었고, 뒹굴며 누웠다 갈 눈밭도 없었다. 오직 홀로였다.

크라이스트처치 행 비행기는 쇼핑몰 귀퉁이에 자리 차지하고 앉아 칭얼대는 아기들을 달래주는 프로펠러 달린 노란 놀이비행기처럼 작고 아담했다. 장난감 같은 비행기는 여명을 박차고 자꾸자꾸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얼굴만한 창문에 이마를 비비면서 내려다본 저 아래 펼쳐진 세상은 맑고 푸르고 상큼하고 자그마했다. 그 싱그러운 아침 풍경에 심장이 바쁘게 들썩거렸다. 바쁜 심장이 평온을 찾을 틈새도 없이 작은 비행기는 금새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하늘에서 내려갔다.

달랑 배낭 하나 짊어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발 디딘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는 상큼한 아침햇살이 은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사방은 파시 (罷市)처럼 한적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낯선 풍경을 어루만지며 발 디딘 도시는 자그마했고 한가했고 여기저기 공사로 번잡스러웠다. 테카포 가는 버스는 아침 일찍 떠나버렸기에 하루를 이 도시에서 두리번거리며 건들거려야 했다.

걸핏하면 지진이 도시를 흔들어댄다고 하지만,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맑고 차가운 에이번 강은 두려움 없이 유유자적 했다. 강이라고 하기엔 앙증맞고 낯부끄럽게 폭이 좁아 차라리 내 (川)라고 하면 더 어울릴 것 같은 에이번 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올망졸망한 다리들도 흔들거리지 않고 당당했다.

그 중 하나인 ‘추억의 다리’도 프랑스 파리의 상징인 아치형의 개선문을 흉내 내었지만, 차라리 ‘다리’라기보다는 ‘추억의 문’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의젓한 모습으로 점잖게 서있었다. 강 곁에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넓은 공원들은 짙은 초록빛으로 눈부신 싱싱한 청춘이었다.

그리고 또, 그곳엔 시내중심부를 뱅글거리는 전차가 있었다. 아, 전차! 그 먼먼 어느 옛날 햇볕 따사로운 봄날, 공휴일이 되면 청년인 그는 처녀인 그 여자와 전차를 타고 고궁으로 놀러 다녔었다. 그 전차가 빨강, 노랑, 초록, 보라색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거기에 있었다. 추억에 젖은 백발의 승객들이 흔들릴 세라 그의 뜀박질보다 더 느리게 시내를 돌며 과거를 속닥거렸다.

그는 전차 옆을 따라가면서 손바닥으로 전차를 쓰다듬었다. 각 잡힌 제모를 쓴 멋진 카이젤 수염의 차장이 나그네를 보고 편안하고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고딕 풍의 건축물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서던 알프스의 만년설은 도시를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듯한 공간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영락없는 에뜨랑제 (etranger)가 돼 도시를 기웃거렸다. 지진으로 부셔진 도시의 심장이었던 대성당 광장 벤치에 앉았다. 광장에는 피에로가 쓰다 벗어놓은 듯한 고깔모자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은 거대한 조형물이 있었다. 서양 피리를 불며 즐거워하는 악사의 발 밑에 놓여있는 모자 속에는 동전 몇 닢이 보였다. 조악한 기념품을 판매대 위에 늘어놓은 덩치가 산만한 마오리 사내가 대성당광장을 ‘광장’다운 광장으로 단장했다.

 

* ‘테카포 가는 길’은 총 4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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