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카포 가는 길 ①

그는,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하는 늘그막의 삶이 스산하고 안타깝고 혐오스러워 바랑을 꾸렸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지, 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하는지를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시간 속을 고뇌하면서 되새김질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대들이 진정으로 사랑과, 존경과, 희생과, 배려와, 예의를 갖춘 마음으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살아왔던가?’라는 아득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결국 그런 것들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자기기만, 이기심, 탐욕이라는 관용적이고 수사적이고 진부한, 언어의 유희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은 쇼윈도처럼 과장해서 억지스러운 색깔과 어색한 몸짓과 피에로의 표정으로 보여줘야 하는 존경 사랑 행복 희생이라는 건 육신을 얽매는 포승이고, 무릎 뼈를 부셔대는 고문이었다.

그는 가식과, 포장과, 지침과, 외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메말라 버린 나뭇잎처럼 바스락대며 가슴속을 파고드는 외로운 방황의 포승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무관심의 안대와, 발목을 파고드는 미움의 차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막연히 어디든 헤매다 보면 자신을 옥죄는 그런 것들을 벗어버릴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보일 듯했다.

그는 미움과 화해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들의 현재가 더 이상 망가뜨려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부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새로워질 수 있는지를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우리들의 부서짐의 원인을 말해다오.” 여자는 촌철 (寸鐵)의 한마디로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냥, 당신이 밉기만 하다.”

그는 뒤늦게 알았다. 삶의 평화를 위하고 삶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는 걸, 한쪽의 양보나 한쪽의 무조건적인 복종의 강요는 증오라는 걸.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한 법이라는 걸.

그는 자신을 세상 한가운데 세워놓고 싶었다. 천만년을 흰 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서있는 높은 산꼭대기에, 이글거리는 태양이 땅 위로 솟아올랐다가 땅 아래로 잦아드는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 위에, 한시도 멈추지 않고 눈부신 포말을 뿜어 대면서도 줄어들지 않은 바다 한복판에, 사람이 사는 땅보다 더 넓고 바닥이 비쳐 보일 듯 너무 맑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호수 위에, 자신을 세워보고 싶었다. 그러면 혹시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질을, 결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틈만 나면 여행정보책자에 천착했다. 책자 속에서 지구라는 행성을 누비며 고색 찬연한 역사의 요람인 유럽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삶과 죽음이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을 남북 아메리카로, 인간과 동물과 벌레가 뒤엉켜 거대한 사냥터로 전락했던 하늘 파란 아프리카를 틈만 있으면 헤집고 다녔다.

그런 밤에는 꿈속을 헤매고 다녔다. 꿈속은 탈것이 없었다. 천지를 걸어 걸어서 애를 태우다 눈을 뜨곤 했다. 꿈을 깬 어느 날은 마음을 다지며 벌떡 일어서기도 했지만 역시, 갈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코끼리를 타고, 낙타를 타고, 노새를 타야 할 노자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험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병신 같은 화상, 그렇게 오래 살아왔으면서 지 떠날 노자도 마련하지 못했단 말이냐, 뭘 하고 살았냐, 바보 멍청이 놈아!

그날 밤도 그는 꿈 속에서 사방이 바위로 둘러진 세상을 헤맸다. 곁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아들이 다가와 소근거렸다. 아부지가 가고파 하는 지구라는 행성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죠, 지금 아부지가 숨쉬는 이곳이 지구죠. 까마득히 치솟은 산도 있고, 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란 고래가 헤엄쳐 다니는 바다도 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이 숨겨져 있는 호수도 있어요.

한번 찾아가 보세요. 어쩌면 호수 바닥에 아부지가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고 앉아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배낭을 꾸리세요, 가서 만나보세요. 만나서 살아온 얘기, 짧게 남은 살아갈 얘기들을 밤새도록 나눠보세요. 여기 노자를 준비했어요. 거기가 테카포예요!

 

* ‘테카포 가는 길’은 총 4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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