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롱가 (Taronga) 친구

은퇴하면서 시드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롱가 워프-클리프톤 가든’ 트레킹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소형관광버스 운전을 잠시 했다는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코스를 알려 주겠다며 처음 보는 우리 부부는 물론 그날 그곳에 온 모두에게 커피를 쏘겠다고 말했다. 그의 스스럼없는 여유로움이 좋아 보였다.

그를 통해 파라마타와 워이워이의 트레킹 코스도 새롭게 알게 될 때쯤, 나는 세 번 연속으로 틱 (tick)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타롱가 걷기를 중단했다. 이 소식에 그는 틱 공격이 없는 에핑역 중심의 산행코스를 제안했고, 매주 함께 하면서 우리가 같은 지역에 살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매번 점심을 먼저 준비하며 서로 알리는 사이도 되었다. 어느 날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 중에 그가 두 개의 기술사 소지자임을 알고, 한 개도 아주 힘들게 취득한 나로선 놀랍고 반가웠다. 나 아닌 한국의 또 다른 기술사가 호주 노동자로 이민 온 보기 드문 사연, 유사 직군의 이민자를 은퇴자로서 만난 점, 반가운 느낌을 넘어 특별한 친밀지수가 만들어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는 공대를 졸업한 공학사 출신 기술사였고, 이민 후에도 기술사로서 한국에서의 수입으로 호주의 삶을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나는 2년 국비직업훈련을 통한 2급 기능공 출신 기술사였다. 출발점이 다르니 당신은 금수저 나는 흙수저 출신이라며 비아냥까지는 아니지만 기회만 되면 아직도 한국은 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나라가 되고 있다며 가끔 치열한 논쟁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출발점은 달라도 세상을 열심히 원칙대로 살아왔다는 점에선 같다는 의미였다. 나 또한 그의 생각에 일부 동의했지만 나머진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첫째 이유의 상징적 사례로 학력 기득권 출신들이 상고 출신 대통령을 업신여기는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한 그들의 횡포가 결국 비극을 유도한 셈이 되었다.

둘째 이유로 IMF 시절 학위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식의 미래 대물림 병폐를 피해, 이민 오게 했음을 주장했다. 아무려면 ‘나이 54살에 철밥통 남은 정년 11년을 버리고 16년 호주 노동자 삶을 선택한 내가 정말 좋아서 했겠는가?’ 하며 열변을 토했었다. 마치 그가 내 이민의 원인 제공자인 것처럼.

그는 잠자코 듣기만 했고 내 상처와 분노에 격한 동의를 표해주었다. 나는 공연히 미안한 짓을 그에게 했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어색한 순간도 있었으나 우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매주 한 번씩의 집 주변 트레킹과 점심을 유쾌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는 공대 졸업 후 열심히 노력해 두 개의 기술사를 취득했다. 나는 23년의 단일직종 경력과 독학으로 이 자격증 한 개를 취득했다. 절대 같은 종류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 자격지심은 없었다. 오히려 과거의 내 삶에 강한 자부심이 들었다. 그러니 이곳 호주에서 한 살차 동년배의 기술사 친구를 만난 기쁨이 더 컸었다. 당연히 친구 이상의 가까운 느낌은 삼 개월 넘게 지속되면서 그가 구입해놓은 그의 묘지에도 소풍을 갔었다.

점심을 먹으며 이곳에 먼저 묻히면 꼭 찾아올 것을 웃는 얼굴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2022년 3월 10일 새벽 4시경 미국 큰아들 집에 있을 때 그로부터 카톡이 왔다. ‘오랜만에 시드니에 화창한 날이 왔네요… 마치 한국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듯이….’

그 동안 그와 단 한 번도 대통령 선거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5년 후면 답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귀국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한번 마주쳤을 뿐, 그 이후의 만남은 없었다.

어느 날 내 모발폰에 그의 카톡 이름이 ‘알 수 없음’로 표기돼 있었고, 내가 입력한 그의 이름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2023년 11월 23일 지인과 함께 병원에 입원한 그의 문병을 하러 갔다. 유쾌한 대화와 감정을 나누었고 나는 아직 당신의 이름과 묘지번호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그의 병실을 나왔다.

2023년 12월 14일 낮 열두 시 전철을 타면 라우즈힐 역에 30분 전에 도착하고 한 시면 묘지 하관식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와 트레킹을 가듯이 배낭에 얼음물과 건빵을 넣고 집을 몇 발짝 나서는데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작열하는 태양빛은 따가웠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식품점에서 김밥 한 줄을 사서 배낭에 넣었다. 그와 함께 다닐 때보다 1불이 올랐다. 그땐 $6.50였는데… 일 년 넘은 단절은 은퇴 후 시작된 새롭고 소중한 친구와의 만남과 산행의 즐거움을 중단시켰다. 그 뿐인가,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수가 없다. 그저 외로운 방랑자로 전락했을 뿐이다. 누가 대통령을 하든 그게 도대체 뭐라고, 집 떠난 놈이 멍청하게… 이제야 5년후의 답변도 매주 즐겼던 유쾌함도 없어졌음을 알아챘다.

에핑에서 탈라왕 행으로 갈아탔다. 전철 안에서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에어컨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위해 배려하는 그의 마음이 다가와 머물렀다. 예상대로 30분 전 라우스힐 역에 도착했다. 하관식 장소까지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걸었다.

내리 쪼이는 눈 부신 태양빛과 올라오는 지열의 양면 공격으로 온몸이 땀으로 젖고 있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참 고생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렴 그 역시 가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불평 없이 걸으며 그를 보내기로 했다. 묵묵히….

그와 함께 갔던 이 길을 홀로 이렇게 빨리 와보게 될 줄이야.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이다. 보행자 버튼을 누르고 홀로 서 있는데 굉음을 내며 달리는 한 대의 스포츠카 소리가 귀를 찢어발기듯 악귀처럼 매몰차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뒤이어 휘몰아치는 바람은 따뜻했다. 놀라지 말라는 그의 마음처럼 포근했다.

기억나는 언덕을 향해 한참을 걷는데, 한 무리의 하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늦었나? 잰 걸음으로 가보니 네 살짜리 꼬마천사의 하관식이었다. ‘천사와 노인이 함께 가는 날이네…’ 내가 말했다. 길 건너 그가 영면할 장소의 하관식 준비는 마무리돼 있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관리인이 다가와 한 시 반으로 변경됐다고 했다.

묘지 옆 동산의 그늘 공간에서 준비해 온 김밥을 홀로 먹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트레킹 왔을 때처럼. 그와 나는 아무도 없는 하관식 장소에서 30분 후 일가 친지의 송별식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독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린 김밥과 건빵 그리고 물을 번갈아 서로 먹으며 이야기 했다. 속이 든든해졌고 평온했다. 그가 말했다. “홀로 썰렁하게 가족들을 기다릴 줄 알았는데 미리 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당신 하관식엔 아마도 내가 있을 거야.”

 

 

글 / 정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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