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메우의 여인

난 정말 어리석었다. 방송이라는 것에 홀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탈탈 털어 투자하고 말았다. 이민 환경과 교민사회 현실에 대해 전혀 무지한 나는 그럴듯한 속삭임에 귀가 멀어버린 것이다. 아니, 나의 헛된 꿈에 스스로 두 발을 담가버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신문사와 방송국에 기자로, PD로 도전했지만 번번히 쓴맛을 봤다. 먹고, 입고, 살아가는 것에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온 아내는 빈털터리 고학생의 끈질긴 삶에 정신 줄을 놔 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단칸셋방에서 ‘왜간장’에 밥을 비벼 먹으며 세월을 기다렸지만, 불러오는 아내의 배를 보면서 언론고시라는 기자, PD직을 포기해야만 했다. 당장 세상에 나올 아이를 먹여야 했고, 삶에 순수하기가 새벽 꽃망울에 맺히는 이슬 같은 아내에게 편안한 미소를 돌려줘야 했다.

삶의 결실을 다져야 할 나이에 이민을 온 나는 그렇게 낯선 땅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 발을 디뎠다. 교민 숫자도 정확히 모르고 교민경제의 부피도 모르고 방송국이라는 말만 듣고, 잃어버린 꿈이 이뤄진다는 황당한 무지개 빛에 홀려 나는 냉정함을 놓쳐버린 거다. 아차! 잘못 투자했구나 하고 느꼈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방송국 운영은 어려웠다. 전파사용료, 인건비를 감안해 산출된 광고료는 영세한 교민업주들에게는 과다한 액수였다. 광고료를 절반가격으로 낮춰도 광고하는 업주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의 업소를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교민방송이라는 이유 때문에 도움을 주는 차원이었다. 그것마저도 광고를 길게 해봐야 3개월정도였다. 콧구멍만한 교민사회에서는 입소문만으로도 사업내용이 알려지게 마련이었다.

방송이 끝나면 먹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르칠 자격증도 없으면서 테니스를 가르쳤고 골프도 가르쳤다. 정확한 이론도 실전도 구비되지 못한 이빨만 까진 순 엉터리 코치였다. 지금도 그때 내게서 테니스나 골프를 배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면서 송구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혹시 그 시절 나에게 배운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매일매일이 어둠의 터널 같던 어느 날, 시내 한복판에 건강보조식품점을 개업했다는 사람이 방송국을 찾아왔다. 그리곤 망설이지 않고 최고 가격인 A등급 광고를 요청했다. 방송국을 스스로 찾아와 광고를 하겠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난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두근거렸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는 ‘홍’가 성을 가졌고, 교만하지 않았다. 적극적이었고 친밀감이 넘쳐났다. 그는 대외업무를 맡고 있었고 전체적인 운영은 한 여인이 맡고 있었다. 최고 가격인 A등급 광고를 하자고 결정한 것이 그 여인이었다. 여인은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모든 행동에 주저주저함이 없이 명쾌했다. 여인과 홍가는 부부였다.

매월 광고료는 한치도 어김없이 보내줬다. 어쩌다 전파사용료 지불에 쫓겨 광고료 수금을 가면 미리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오히려 얼굴 붉히며 허둥댔다.

관광객이 줄어들고 교민경제가 뒷걸음질쳐, 운영하는 건강식품사업이 어려워지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여인의 얼굴에는 근심이나 어둠의 그림자가 없었다.

사업이 어려워지면 제일먼저 손대고 줄이는 것이 광고료인데, 여인은 광고를 중지하라는 말도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방송국 문을 닫는 날까지도 그랬다. 한참 후 여인도 사업을 접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 가슴 속에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지워지지 않을 여러 가지 미안함과 송구스러움이 뭉쳐져 있다. 그 중 하나가 방송국 문을 닫을 때 도와주던 광고주들을 한 분 한 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다. 끝날까지 변함없이 후원해준 여인과 그의 영감 홍가에게도 감사했다는 말을 못했다.

얼마 전 교민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때 그 여인이 교민신문에 글을 썼다. 글 속에서 풍겨지는 여인의 삶은 못 만나 본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밝고 활기찼다. 여인은 오클랜드 서쪽 쿠메우에 살고 있었다.

나, 더 많이 늙기 전에, 코로나19 외출금지가 풀리면 ‘쿠메우의 여인’을 찾아서 그때 못했던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다. 그래, 아름다운 인연은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가 보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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