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유태인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유태인 때문에 흑사병, 기아와 같은 자연 재앙이 일어난다고 여기고 명망 있는 모든 수공업적 직업에서 유대인을 배제하는 등 박해를 가했다. 20세기 들어서는 유태인, 집시 등에 대한 편견과 박해가 극을 향해 달렸다. 이는 히틀러 등 나치들에 의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종 청소작업을 자행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법적으로 흑인을 차별해 흑인정당을 일절 불법화하고 철저한 백인주의를 취했다. 미국 역시 남부를 중심으로 흑백 차별이 지속되는 현상을 보였다. 호주도 원주민들을 향한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한 인류이면서 왜 차별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과연 인종차별은 백인에게만 있는 것일까? 나도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닌가? 오늘, 인종차별의 슬픈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구성/정리 전수화 기자>

 

PART 1

최악의 인종차별정책과 그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역사적으로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비인간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여러 방면에서 차별을 받아왔다. 특히 그 중에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인종차별정책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분리’ 또는 ‘격리’라는 뜻으로 이 정책의 목표는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하여 백인과 흑인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01_악명높은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Image result for reservation of separate amenities act of 1953이 정책에 따라 1959년부터 남아공의 흑인들은 지정된 지역에 격리 수용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백인들에게 권리를 침해 당하였다.

흑인들은 백인과 결혼할 수 없었으며 공공시설이용에서도 백인들과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인권적 제도는 전 세계 적으로 많은 질타를 받았고 결국 1994년 자유 총선거에서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폐지되었다.

하지만 법제상으로 아파르트헤이트는 철폐된 제도일지라도 아직 남아공의 백인들에게는 그러한 차별이 은연중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흑인경영포럼 (Black Management Forum: BMF) 회장까지 맡았던 정부 대변인 짐미 마니 (Jimmy Manyi)가 신문사와의 인터뷰 도중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던 것이 최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짐미 마니는 ‘칼라드 (Coloured)인들’이 서부 케이프 (Western Cape)에 너무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현상이 서부 케이프 주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칼라드가 국정의 고위 관료로 많이 진출해 있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재경부장관을 역임했고 국가기획위원회 (National Planning Commission) 장관인 트레보 마뉴엘 (Trevor Manuel)이 그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처음 계획했던 전 대통령 페르푸어르트 (HF Verwoerd)와 다름없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인종차별이 다시금 이슈가 되고 있다.

이렇게 아직도 – 심지어 흑인 단체의 대표까지도 – 아파르트헤이트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아공 사회의 모습이다.

 

02_남아공, 끝나지 않은 ‘아파르트헤이트’ 차별의 짙은 그늘

Related image흑백화합의 상징인 만델라 전 대통령이 2013년 서거하면서 남아공에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남아공의 흑백화합 실상은 어떨까?

흑인들은 만델라를 거의 성인처럼 추앙한다. 만델라가 병중에 있을 때는 입원 중인 프리토리아의 병원 앞에 쾌유를 비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만델라 이전엔 백인들과 학교를 다닐 수 없었지만 지금 내 아이들은 함께 사립학교 다니고 있어요” 백인들도 흑백화합을 이뤄낸 만델라에게 깊은 존경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격차는 여전하다. 남아공의 경제중심도시 요하네스버그는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은 마천루를 자랑한다. 하지만 대형 만델라 동상이 서 있는 도심광장으로 가면 세련된 카페의 고객들은 대부분 백인, 접대하는 종업원들은 흑인이다.

변두리에 자리 잡은 흑인들의 거주지는 흡사 우리나라 1950-60년대 판자촌이나 철거민촌을 연상시킨다. 흑인들이 거주하는 요하네스버그 인근 대표적 빈민촌은 대낮이지만 치안이 워낙 안 좋아 외부인이 들어가는 건 매우 위험하다. 경찰도 포기한 상태이다. 이곳에 외부인이 가는 것은 맨몸으로 강도에 노출 되는거 나 마찬가지이다.

주민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고물을 주워 팔아 가까스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만델라는 존경하지만 사회에 대한 불만은 넘쳐난다. “정부가 부패했어요. 돈 빼돌려 자기들 배를 채우느라 혈안이 됐죠. “아파르트헤이트는 끝나지 않았어요. 계속되고 있어요.”

실제 백인들 평균소득은 선진국수준인 4만불이지만 흑인들은 최빈국수준인 1000불 대이다.

백인들의 권력독점은 없어졌지만 수백 년간 계속된 부의 독점은 좀처럼 해소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흑인 정권이 2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차별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생각되지만 현실에서 격차를 줄여 통합된 사회로 나아가는데 있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PART 2

호주의 ‘원주민가족 와해정책’

정부가 훔쳐간 아이들… 그들은 ‘노예’였다

혼혈 원주민 아동들에게 ‘문명화’ 혜택을 줬다? 1930년대 다윈의 한 신문에 게재된 사진 “수용소 여자아이를 데려갈 분!” 사진 중앙의 아이에게 X마크가 되어 있고 “중앙에 있는 아이가 마음에 드는데 누가 이미 데려갔으면 다른 아이라도 상관없다. 애만 튼튼하다면…”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땅 호주… 그 땅을 지키던 최초의 호주인들. 그들이 당했던 부당한 인종차별의 실태를 보고한다.

01_백호주의 정부의 거짓 주장 시나리오

Cartoon titled ‘The Mongolian Octopus’, The Bulletin, 21 August 1886. National Museum of Australia“우리가 이 거대한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습니다. 아서 필립 (1738-1814 / 영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행정관)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타고 항해한 결과 1788년 1월 26일 드디어 시드니 항구에 도착했거든요. 그렇게 NSW 식민지를 건설한 거죠. 그때의 시드니는 허허벌판이었고 빈 땅이었어요. 그 땅을 개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런데 그곳에 원시인이 살고 있더군요. 우리는 그들을 애보리진 (Aborigine)이라 부릅니다. ‘ab-(떨어져서)’와 ‘origine’이 결합된 말로 ‘원래부터 있던 사람’이라는 의미이죠. 줄임말로 ‘Abo’라고도 표기한답니다. 사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웠어요. 굉장히 미개했죠.

그런데 이 호주대륙에 영국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백인 이민자들과 미개한 원주민들 사이에 혼혈아가 태어나기 시작한 거죠.

이 야만적인 원주민사회에서 혼혈원주민 아이들 – 저희들은 이들을 하프캐스티드피플 (half casted people)이라 부릅니다 – 을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문명화된 백인들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아이들 아닙니까? 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 아이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자 우리는 이 혼혈아들을 애보리진 마을에서 구출해낸 후 문명화 교육을 받게 하고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애보리진으로부터 떼어놓아야 백인사회에 흡수될 수 있고 애보리진의 흔적을 영원히 없앨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그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00년에서 1972년 사이 적어도 3만 5000명의 아이가 이런 ‘혜택’을 받게 되었죠. 어차피 호주대륙에 함께 사는 이들이니 ‘동화정책’을 편 거죠. 그 원시적인 마을에서 열악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02_가슴 아픈 진실- 10만 혼혈아동들, 백인들의 노예로 ‘도둑 맞았다’

1992년 12월 10일, 역사적인 연설이 있었다. 당시 총리이던 폴 키팅 (Paul Keating)이 남긴 ‘레드펀 연설 (Redfern Speech)’이 그것이다. 폴 키팅은 시드니의 원주민 밀집 지역인 레드펀에서 행한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원주민-백인 간의 국민적 화해를 촉구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비원주민인 호주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따라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그러한 잘못에 대한 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수탈을 자행한 사람들은 바로 백인들이다. 우리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원주민들의 전통적 삶도 망가뜨렸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 병균을 가져왔으며 술도 가져왔다. 우리는 살인도 저질렀다.

또한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았다. 우리는 인종적 차별과 인종적 배제를 서슴지 않았다. 그건 모두 다 우리의 부주의와 편견으로부터 나온 결과였다. 이러한 일들이 백인들에게 일어났더라면 하는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조차 무시하였으며 그들의 마음과 몸이 되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우리 모두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애보리진이라 불리는 호주 원주민과 백인 이주민 사이의 관계가 그간 어땠는지, 이 연설에 모든 해답이 나와 있다. 백인 이주민들은 원주민의 모든 것 (땅과 생활방식, 심지어 가족까지)을 박탈하고 파괴하고 빼앗았다.

하지만 폴 키팅이 이 유명한 연설을 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1992년 전에는 백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원주민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리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사실 원주민들은 애보리진이라는 말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을 타자로 만들어 버린 단어 아니겠는가. 대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동부와 남부에서는 자신들을 ‘우리 사람’이라는 뜻의 ‘쿠리’라 부르고 서부에서는 ‘녕가’ 라 일컫는다. 북부에서는 ‘요잉구’ 그리고 중앙에서는 ‘아낭구’라 칭하며 남부에서는 ‘넝가’라 부른다.

반면 최근 진보적인 호주인들은 원주민을 가리킬 때 ‘최초의 호주인 (The First Australians)’이라는 말을 가장 선호한다. 이 까만 피부의 호주인들은 적어도 4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에서 호주로 건너왔다고 추측되니 말이다. 백인들이 호주를 발견했다는 말 자체가 원주민들에게는 모욕인 셈이다.

백인들이 호주로 이주해 오던 당시 원주민 인구수는 25만-75만 명으로 500-600개 정도의 독립된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유럽인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가던 1860년에 원주민의 인구는 2만 2000명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통계는 알지 못한다. 1967년까지 원주민들은 아예 사람으로 취급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967년에 열린 국민투표에서야 90.8%의 호주인은 원주민도 호주 국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03_땅과 언어, 목숨과 가족까지 빼앗겨온 원주민들

Image result for stolen generation도대체 원주민들은 얼마만큼 미개했기에 불과 30년 전에서야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이 된 걸까?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들의 조상은 백인이 이주할 무렵에도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분명 그들만의 엄격한 사회적 체계와 지도자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체계와 지도자의 통솔 하에 경제활동도 영위하고 있었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거나 모임을 갖고 전통의식도 치렀다는 사실에서 그들만의 전통적 문화요소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원주민을 접한 백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주체 없이 살아가는 원시인 정도로 비춰졌다. 그래서 백인들이 그렇게도 쉽게 원주민들을 학살했는지도 모르겠다.

백인들은 말에 올라탄 채로 총을 쏘아가며 인간사냥을 했고 기록으로 남은 사건인 1928년 노던 테리토리지역의 ‘코니스톤 대량학살’에서도 확인됐듯 원주민들의 음식물과 물에 독극물을 넣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백인들이 호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곳을 마치 사람이 안 사는 것처럼 ‘빈 땅’이라고 발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럽인들은 원래의 주인과 협상해야 할 법적인 필요성을 애초에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땅을 쉽게 차지했다. 이는 원주민들이 영토에 대한 소유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밀가루 몇 포대와 농기구 몇 개에 엄청나게 넓은 땅을 넘기기도 했고 그러다 때로는 무참히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탈취한 땅에 백인들은 양, 토끼, 소를 들여와 목초지를 만들었다. 유럽식 양목산업의 발전으로 가축들이 넓은 오지를 점유하게 되고 그만큼 원주민들의 야생 활동은 위축됐다.

또 이 가축들이 목초를 먹어 치우면서 비옥했던 토양이 점차 사라지고 토종동물들도 멸종돼 사냥으로 지탱되던 원주민 경제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백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질병들 (수두, 천연두, 독감, 성병, 홍역 등)은 유전적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의 생명을 추수하듯이 앗아갔다. 특히 시드니 인근에서는 천연두로 인해 2년 새 절반이 넘는 원주민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호주대륙은 ‘백인천하’가 되어갔고 반면 원주민들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원주민들의 언어만 봐도 그렇다. 원래 원주민들은 250개에 달하는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쓰며 살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50개 언어는 현재 완전히 소멸됐다. 간신히 살아남은 언어들도 그 대부분은 사멸의 위기에 몰려 있다. 이같이 백인들이 원주민에게 가한 잘못은 수도 없이 많다.

 

04_굶주림과 구타, 악몽으로 남은 수용소 안의 삶

하지만 제일 경악할 만한 범죄는 따로 있다. 바로 백인들과 원주민 간 ‘동화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은 일이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이 늘어나자 이들을 백인사회로 흡수시키기 위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가족와해정책’은 연방정부 특별법에 의해 일괄적으로 시행됐다.

연방정부는 각 주의 법령을 통해 원주민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놓는 것을 인가해 190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전체 원주민 아이의 10-30%로 추정되는 최소 10만 명 (원주민 측 주장)의 혼혈아동들이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그 미개한 사람들과 미개한 곳에서 살지 않도록 구출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렇게 혼혈아동에게 남은 원주민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시행된 정책인 만큼 주로 피부색이 하얀 원주민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강제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 때문에 원주민 부모들은 일부러 자기 아이들의 피부를 검게 만드는 일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수용소 등에서 백인화, 문명화 교육을 받은 후 순수 원주민에 가까운 혼혈은 강제노역 현장으로, 백인에 가까운 혼혈은 신문광고 등을 통해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행복했을까? 오히려 생지옥으로 내몰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애초 사랑하는 엄마의 품에서 강제로 떨어지는 것 자체가 이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질 노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거침없이 쓰던, 원주민의 말을 해서도 안 됐다.

이렇게 전혀 다른 생활환경 속에서 적응하는 일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얌전히 문명화 과정만 거쳤다면 사실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열악한 수용소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예컨대 세 살 때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야 했던 로이 스튜어트 (Roy Stewart)는 그가 수용됐던 NSW 킨첼라수용소 (Kinchela Boys’ home)에서 겪은 기억 때문에 77살에 죽을 때까지 평생을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수용소에서 술 취한 감독관이 때려죽인 아이들을 땅에 묻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수용소 안에 있던 혼혈아동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셈이다. 이들이 수용됐던 고아원이나 교회 시설의 담벼락에는 탈출을 막기 위해 철망을 쳐놓기도 했다고 하니 사실상 감옥과 다름없었다.

 

05_노동착취와 성폭행… 백인 가정의 ‘노예’였을 뿐

그렇게 ‘문명화’ 과정을 거친 아이들이 마침내 백인 가정이나 선교기관에 도착한 순간,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 아니,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여자아이들은 가정부로, 남자아이들은 농사나 노동일을 돕기 위해 백인들에게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구타당하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거의 노예와 맞먹는 수준의 노동착취까지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중 10분의 1이 넘는 아이들은 성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이 1941년생 발레리 리노우 (Valerie Linow)이다. 그녀는 두 살 때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보매더리수용소 (Bomaderry Children’s home)에서 살다가 1958년 열여섯 살 때 백인 목축업자 가족의 하녀가 되었다. 사건은 그녀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일어났다. 발레리가 우유 양동이를 엎지르는 실수를 하자 목축업자가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한 것.

“그는 갑자기 내게 ‘들어가 있어!’ 하고 소리쳤고 몇 분 뒤 울타리용 가시가 박힌 철사로 제 다리를 때렸지요.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려 몸을 웅크렸고 결국 다리에 흉터가 생겼어요.”

그의 폭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발레리를 폭행한 그는 그녀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더니 따라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 던진 후 성폭행했다. 만신창이가 된 발레리는 용기를 내어 경찰에 신고했지만 역시나 그 목축업자는 기소되지 않았다. 경찰에게 있어서 혼혈아동의 인권은 지켜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권이란 ‘백인의 권리’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이들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강제로 고아가 된 그들은 평생을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고 백인 가정에서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낮은 자존감, 우울증, 불신, 자괴감, 분노 역시 몸집을 불려갔다.

이 같은 학대와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들은 썩은 동아줄을 잡듯이 약물과 알코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 불쌍한 고아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가족을 찾고 있으며 자기들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Stolen Generations (도둑맞은 세대)’라고도 부른다.

 

06_2008년 총리의 공식 사과… 하지만 계속되는 아픔

Image result for 케빈 러드그렇게 애보리진의 가족들은 와해되었다. 이제 그들은 호주 전체 인구로 따지자면 2%, 50여만 명에 불과하다. 그 50만 명 중 약 4분의 1이 ‘도둑맞은 세대’이다. 이 도둑맞은 세대의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호주 원주민은 문맹률과 빈곤율이 높다. 평균수명도 백인보다 17년이나 적다. 실업률은 백인보다 3배나 높고, 범죄로 구속되는 비율도 2.8배에 이른다. 자살률도 일반 호주인들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백인 사회나 정부는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가 호주 백인 사회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며 걱정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같은 상황에 맞서 최근 원주민 사회에서 호주 백인 사회에 무조건 동화되기보다 원주민 통합과 함께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도둑맞은 세대’들의 권리 찾기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1995년 연방정부는 지난날 원주민 아이들에 대한 강제입양 및 분리정책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질의를 개최했고 이어 1997년 4월에는 인권 및 평등위원회가 연립정당 정부에 ‘집으로 데려오기 (Bring them Home)’라는 보고서를 전달하며 ‘도둑맞은 세대’의 가족을 찾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연방의회에서 당시 총리였던 케빈 러드는 “우리는 동료 호주인 (원주민)에게 깊은 슬픔과 고통, 손실을 안긴 역대 정부 및 의회의 법률, 정책들에 대해 사과한다”며 용서를 구했고 의회도 러드 총리가 발의한 원주민에 대한 사과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을 위해서였다”고 홍보하고 자위했던 정책이 사실상 거짓이었고 실패작이었음을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달리 여전히 호주 백인 사회에는 아직도 원주민아동 강제분리정책이 당시로써는 원주민 아동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36년간 식민지배를 해놓고 그것이 한국을 개화시켰다고 이야기하는 일본 극우파의 논리와 똑같다. 일제강점기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당하고 일본말을 써야 했다. 원주민의 언어를 쓰지 못하고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던 혼혈아동들의 상황과 무엇이 크게 다르랴.

 

PART 3

흑백의 시대가 있었다

인종차별 녹여낸 영화 다섯 편

최근 개봉한 영화 그린 북. 인종차별에 관련한 이야기를 감동스럽고 유쾌하게 그려내며 예술영화 흥행의 선봉장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잔존하는 인종차별을 그린 영화 다섯 편을 소개한다.

 

01_히든 피겨스 (2017)

Image result for Hidden Figures감독: 데오도르 멜피

출연: 타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자넬 모네

줄거리: 회의 참여 불가 화장실 이용 불가 식당 이용 불가. 세상의 편견에 맞선, 정면돌파 그녀들이 온다.

 

천부적인 수학 능력의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NASA 흑인 여성들의 리더이자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흑인 여성 최초의 NASA 엔지니어를 꿈꾸는 메리 잭슨.

미국과 러시아의 치열한 우주 개발 경쟁으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 천부적인 두뇌와 재능을 가진 그녀들이 NASA 최초의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선발된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800m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으며 공용 커피포트조차 용납되지 않는 따가운 시선에 점점 지쳐간다.

한편,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는 난항을 겪게 되고 해결 방법은 오직 하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수학 공식을 찾아내는 것뿐인데…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세계를 놀라게 한 그녀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흑인과 백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를 보면 대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많다. 히든 피겨스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옥타비아 스펜서와 타라지 P. 헨슨 그리고 자넬 모네가 열연을 펼친 이 영화는 미국 NASA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차별이란 이야기를 그리는 상당히 아픈 영화임에도 유쾌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활기차게 연출한 점이 인상적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진짜 가슴 따뜻하고 마음이 뭉클해지는 경험, 그런데도 밝은 기운을 전달받는 영화이다.

 

02_오직 사랑뿐 (2018)

감독: 엠마 아산테

출연: 데이빗 오예로워, 로자먼드 파이크

줄거리: 1947년 전 세계를 사랑으로 물들인 아름다운 실화 러브스토리. 1947년 영국,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세레체와 루스는 첫눈에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당시 영국 보호령이었던 베추아날란드의 왕자 ‘세레체’와 평범한 영국 여자 ‘루스’의 뜨거운 사랑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데….

비단 미국에만 흑인에 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 오직 사랑뿐은 1947년 영국에서 시작된 두 남녀의 위대한 사랑에 관련된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남자로 이야기 듣는 세레체는 어느 댄스 파티장에서 만난 루스와 첫눈에 반하게 된다.

하지만 1947년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왕국에서 그 기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할 즈음이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서 흑인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0.02% 정도였다고 한다. 그랬기에 세레체는 흑인 차별에 관련하여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하며 지낸다.

그런 세레체에게 다가온 루스… 인종차별보다 더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을 덮치지만 루스와 세레체는 오직 사랑 하나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낸다. 루스의 연설장면은 아주 마음이 뜨거워지는 영화의 명장면이다.

 

03_그린북 (2019)

Image result for 그린북감독: 피터 패럴리

출연: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

줄거리: 언제 어디서든 바른 생활! 완벽한 천재 뮤지션 돈 셜리. 원칙보다 반칙, 다혈질 운전사 토니. 취향도, 성격도 완벽히 다른 두 남자의 특별한 우정이 시작된다.

 

1962년 미국,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는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요청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돈 셜리는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투어 기간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토니를 고용한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토니 발레롱가와 교양과 기품을 지키며 살아온 돈 셜리 박사. 생각, 행동, 말투, 취향까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그들을 위한 여행안내서 ‘그린북’에 의존해 특별한 남부 투어를 시작하는데….

1960년대 미국. 그때는 히든피겨스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 내에 흑인에 관련한 차별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다. 화장실이며 술자리에서도 심지어 식당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한정적이었고 그리고 폭력적이었던 시대. 그런 시대에 만난 두 사람의 진한 우정에 관한 영화가 그린북이다.

토니는 일자리에서 폭력을 행사하여 회사를 나오게 됐고 돈 셜리의 운전사로 면접을 보게 된다. 그렇게 돈 셜리의 운전사로 일하게 된 토니… 성격에서부터 모든 것이 정반대였던 이 두 사람이 함께 길 위를 달린다.

삐걱대고 싸우기도 하지만 토니는 점차 돈 셜리를 친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굉장히 츤데레한 토니와 굉장히 우아한 돈 셜리. 그들이 길 위에서 나누는 그 모든 것들이 참 마음 따뜻해지는 우리의 그린라이트를 밝혀주는 소중한 이야기다.

 

04_겟 아웃 (2017)

Image result for 겟 아웃감독 조던필

출연 브래드리 휘트포드, 앨리슨 윌리암스, 캐서린 키너

줄거리: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친구 집에 초대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영화 겟 아웃. 처음 이 영화를 접할 때 공포 영화 혹은 스릴러 영화 정도로 생각을 하고 봤을 것이다. 크리스는 여자친구인 로즈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부터 시작되는 공포는 분위기가 주는 압도적인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여자친구의 집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기이한 일들이 크리스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크리스를 보는 많은 로즈의 가족과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들. 그리고 자꾸만 기이한 행동을 하는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에 크리스는 점점 느낌이 쎄해오는 감정과 맞닥뜨리게 된다.

전개되는 이야기의 파격적인 힘 때문에 엔딩에 이르러 신선한 느낌 받을 수 있다. 그러함에도 영화에서 보여주는 흑인과 백인에 관련한 불편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다.

 

05_헬프 (2011)

Image result for 헬프 (2011)감독: 테이트 테일러

출연: 엠마 스톤, 비올라 데이비스, 옥타비아 스펜서

줄거리: 1963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잭슨 흑인 가정부는 백인 주인과 화장실도 같이 쓸 수 없다? 아무도 가정부의 삶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책을 쓰기 전까지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정원과 가정부가 딸린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게 최고의 삶이라 여기는 친구들과 달리 대학 졸업 후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역 신문사에 취직한 스키터 (엠마 스톤).

살림정보 칼럼의 대필을 맡게 된 그녀는 베테랑 가정부 에이빌린 (바이올라 데이비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른 인생은 꿈꿔보지도 못한 채 가정부가 되어 17명의 백인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봤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사고로 잃은 에이빌린.

스키터에게 살림 노하우를 알려주던 그녀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자신과 흑인 가정부들의 인생을 책으로 써보자는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때마침 주인집의 화장실을 썼다는 황당한 이유로 쫓겨난 가정부 미니 (옥타비아 스펜서)가 두 여자의 아슬아슬하지만 유쾌한 반란에 합류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는 에이빌린과 미니. 그녀들의 용기 있는 고백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책을 탄생시키는데….

영화 ‘헬프’는 1960년대 미시시피주를 그리는 영화이다. 1960년대의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그야말로 극에 달한 시기이다. 미시시피주는 그런 차별이 굉장히 심한 곳이었는데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굉장히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람을 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멸감을 안겨주고 바라보는 시선들이 관객을 분노케 만드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에 관련한 이야기도 있지만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학대에 관련한 이야기도 담겨 있기에 흑인 여성들이 겪었던 차별에 차별을 그려냈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였던 ‘그녀들’의 용기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그녀가 감내하며 살아와야 했던 세월에 등을 토닥여주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다.

 

PART 4

나도 인종차별주의자?

과연 우리는 인종차별적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까?

인종차별은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여행 유튜브를 보면 유럽에서, 인도에서,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미국에서 등 정말 많은 곳들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한국인들이 그것들에 대한 영상을 올린다. 그리고 댓글들을 보면 유럽인들이 하면 나쁜 놈들이고 인도인들이 하면 하찮은 놈들이 ‘개기는’ 거다. 왜 같은 차별을 받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걸까? 내가 당하는 인종차별에 대해 불평을 하기보단 우리가, 아니 내가 먼저 인종차별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01_과연 우리는 인종차별적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까?

Image result for racism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 심리학자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자며 이는 그들 안의 암묵적 편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암묵적 편견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측정하고 이를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버드대 연구팀이 활용하는 암묵적 편견 테스트 (Implicit Association Test: IAT)라는 것이 있다. 이는 인종뿐 아니라 동성애자, 장애인, 과체중인 사람에 관한 사고를 조사한다.

인종에 대한 시험은 단어와 얼굴을 선택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단어는 멋진, 우정, 기쁜 등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와 고통, 증오, 더러운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있다. 최대한 빨리 선택해야 하고, 테스트는 선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측정한다.

지난 수십 년간 암묵적 편견과 반대되는 개념인 ‘명시적 편견’은 눈에 띄게 줄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영국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국제결혼을 반대했지만 2011년에는 15%만이 반대했다.

미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1958년에는 94%가 백인과 흑인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2013년에는 단 11%만이 반대했다. 반면 암묵적 편견은 명시적 편견보다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IAT는 약 20년 전에 도입됐고 하버드대 웹사이트에서만 1800만 명이 테스트했다. 하버드대 연구진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우 흑인과 부정적인 단어를 연관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나 미국 내 경찰의 흑인 과잉진압, 병원에서 백인 환자와 흑인 환자가 다른 대우를 받는 것 등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부 설명한다고 일각에서는 보고 있다.

암묵적 편견이라는 개념은 최근 많이 등장했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도 트럼프와 대선 토론에서 “암묵적 편견은 모두의 문제다”라고 발언했다.

일부 회사에서는 이 시험을 이용해 직원들에게 다양성 교육을 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시험을 보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내재하여 있는 편견을 깨닫게 한다는 목적이다. 기업들은 편견을 제거하면 직원은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수익성이 좋아진다고 본 것이다.

 

02_인종갈등의 과학적 원인은?

인종 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1. 인종적 편견, 부모로부터 형성돼   

심리학, 뇌과학 등의 과학자들이 미국의 인종갈등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관심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인종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게 되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는 일이다. 예일대 사회심리학자인 제니퍼 리치슨 (Jennifer Richeson)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원인에 대해 간단하게 답변했다.

“사람들이 태어나면 부모 등으로부터 그들이 태어난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된다.”는 것. 문제는 이때 인종차별주의 (racism)를 배운다는 점이다. “부모가 인종차별을 반대하면 자녀 역시 인종차별을 반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위 환경으로부터 인종차별을 보고 자라면 그런 고질적인 악심 (evil heart)을 갖게 될 수 있다”며 인종차별주의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리치슨 교수는 “이런 편견이 학교에서 생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가 전학을 하게 되면 같이 공부하게 될 학생들을 파악하게 된다. 누가 멋있는지 아니면 따분한지 누구와 친해야 하는지 아니면 패주고 싶은지 등등. 그리고 이 학생 집단에 참여하는데 이때 인종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본인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집단에 소속하고 싶어 한다.

뉴욕대에서 편견과 정치학의 역학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심리학자 에릭 놀스 (Eric Knowles) 교수는 “생물학적으로 사람들의 이런 집단적인 성향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 본성 안에 집단적인 성향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

그러나 인종차별주의를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이런 행위는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적 (social) 현상이라는 것이다.

 

2. 인종차별은 내 안의 두려움과 분노의 비겁한 표출

Image result for angry“일부 계층이 자신의 두려움 (fear)과 분노 (resentment)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못하고 그 대신 검증되지 않은 편견으로 자신을 표출하고 있으며 특히 인종과 관련된 집단적 편견이 축적될 경우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인지상주의 그룹 역시 그들의 추종자들과 함께 피포위 심리 (siege mentality)를 발전시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피포위 심리란 자신들이 항상 적들로부터 둘러싸여 있으며,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고 여기고 긴장해 있는 강박 관념을 말한다.

놀스 교수는 버지니아주 샬로츠빌에서 벌어진 충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슬로건을 예로 들었다. 백인 생명도 중요하다 (White Lives Matter), 당신들이 우리를 몰아내지 못한다 (You will not replace us) 등등.

예일대 리치슨 교수는 “이런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건전한 문화를 조성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구성원들에게 선 (good)과 악 (bad)에 대해 분명한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의 경우 인종갈등은 국민 화합을 저해하고 국가 자체를 와해시키는 심각한 요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런 갈등의 원인이 편견에 의한 결과로 보고 적극적인 사회적 해법을 조언하고 있는 중이다.

놀스 교수는 “인간의 집단 심리 측면에서 집단과 집단 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어린 시절부터 인종에 대한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문화 조성이 시급하다.

 

3. 인종차별주의의 한계

노골적인 형태의 인종차별은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인종주의는 ‘자신의 인종이 우월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다른 인종의 사람에 대한 편견, 차별 또는 대립’으로 정의된다.

인종차별은 미국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질병으로 묘사되어 왔다. 누구나 어느 정도 인종차별주의자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정도가 심할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그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노골적인 인종차별 만이 차별로 간주된다. 미묘한 형태의 인종차별은 만연하다. 미묘한 인종차별의 한 예가 동일한 이력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이 아닌 특정 인종이나 문화적 배경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인터뷰에서 탈락하는 경우다.

 

4. 심리학으로 보는 세 가지 이유

Image result for racism심리학은 세 가지 이유를 보여준다. 한 가지 이유는 자기 보호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또 다른 이유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국 심리 학회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는 전국 설문 조사에서 백인이 ‘유색인종’ 사람들보다 인종차별을 덜 경험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 적으면 문제에 대한 감도가 떨어지고, 인종차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행한다.

세 번째 이유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실험에 참여한 백인과 흑인 모두 인종차별에 관한 지식과 인식의 차이에 따라 인종차별을 더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아주 소수이다. 미묘하고 더욱더 널리 퍼져있는 암묵적 인종차별주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03_나에게 있을 수 있는 인종차별주의 버리기

Image result for racism첫째, 내가 인종차별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버리자.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준의 인종차별을 겪고 있다. 색맹은 인종차별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나의 ‘인종차별적 의식’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둘째,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향해 지나치게 민감한 것으로 무시하지는 않았는가?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보자.

셋째,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인종 그룹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의 말을 듣고 교육 비디오 또는 시민 단체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공부해보자. 인종차별은 ‘무식함’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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