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나를 찾다

나에게는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이 있다. 세월이 지나도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더 나은 ‘나’로 발전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막연히 이러한 생각, 바램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성장하고 보다 멋진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갈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 무엇이든 행복한 삶을 향해 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금화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이 될 수도 있으리라.

최근에 <아트인문학>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 김태진은 이렇게 말한다. “통찰을 얻는 과정은 단단한 껍질을 뚫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방법은 인문학 고전을 읽는 것이다. 껍질을 지나 과즙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행복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통찰이 가져다 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다시 말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이고 안고 서는 자리, 가야 할 곳 가지 말아야 할 곳, 균형 잡인 말과 행동, 이러한 보이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지표가 되어주는 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통찰력을 가진다는 것과 그 지혜를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 라는 문제와 마주한다.

지난 7년 동안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추천도서들을 나름 많이 읽었다. 특히 지난 3개월 시간적 여유가 생겨 더욱 책 속에 묻혀 살면서 설렘과 감동이 나를 에워 쌓았다. 한 권 한 권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충만했던 희열은 내 짧은 언어로 어찌 다 표현할지 몰랐다.

나에게 ‘통찰’이라는 한 단어로 농축되어 선물처럼 스치듯 다가와 내 가슴 깊은 곳에 늘 염원하던 그 무엇과 만날 수 있다니, 내가 그토록 바랬던 그것은 바로 김태균이 말하는 ‘과즙’이었던 것이다. 구절구절 어떤 보화보다도 귀하고 값진 것이 되어준 나의 책 읽기가 감사하다.  ‘통찰력’을 키우자는 포기할 수 없었던 나의 욕망, 보다 나은 나로 살고자 했던 그것을 얻으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확실한 길이 주어진 것이다.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알고 있는 것과 체험하는 것이 다르듯 이제야 비로소 그 달콤한 과즙을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동안 나는 잠시나마 드라마나 영화 속의 다른 인물 역할을 하는 연기자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고 그것을 즐겼다. 연기할 때처럼 나는 책을 읽을 때도 책 속의 주인공이 되곤 한다. 오래 전에 읽은 책 중에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읽고 ‘현각’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스님이 되어 사찰에 귀화한 미국사람의 자전적 이야기에 나는 매료되었다.

크리스천으로서 누구보다도 대학 복음화라는 열정을 가지고 대학 캠퍼스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였다. 하버드의 엘리트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그곳에서도 인적이 드문 사찰에서 살게 된 전환점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머무는 서울 화계사로 달려가고 싶었다.

직접 스님을 만나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전도하겠다는 사명감이 아니라 불교의 어떠한 것들이 그를 매료시켰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책 속에서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직접 만나서 그의 눈빛으로 그의 표정으로 그가 깨달은 진리, 또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대화로 나눠보고 싶었다. 그게 간절함인지 단순한 충동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처럼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게는 무한한 상상과 열정의 도가니이다. 내가 막연하게 바랬던 보다 나은 나를 어떻게 다듬어 갈 것인지 그 도구가 무엇인지 희미하게 잡히지 않았던 것이 이제 비로서 맛을 보았고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하다.

이제 그 길을 달려갈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소중한 것은 없다. 책 읽기로 더욱 풍성하게, 배움으로 겸손하게 내 속 사람이 영글어져 지금보다 나은 나로 살아가고 싶다. 사랑도 보화도 있다가 없어지는 것, 나의 사람다운 사람됨은 내가 살아 숨쉬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 할 것이기에….

 

 

글 / 클라라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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