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온갖 생명체들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가진 개체들의 죽음은 필요한 과정이라는 거다. 어떤 생명체도 생태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진대, 삶과 죽음은 존재의 양면으로 동일한 비중과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다시 가을이다. 낙엽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저 멀리 간다. 나무들은 푸른 잎들을 떨구고 앙상한 육신을 드러낸다. 그렇게 우뚝 서서 세월을 견디며 다시 푸르러질 날들을 기다릴 거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나뒹구는 메마른 나뭇잎들을 치우노라면, 세월이 변함없이 멈춤도 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도 그렇게 계절을 따라 낙엽처럼 늙고 나이 들고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저간에 유난스럽게 죽음 소식이 잦다. 삶의 즐거움 기쁨 아픔 고뇌를 연기하던 연예인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정치인 중 올곧은 정치인도 눈을 감았다.
사람은 늙고 나이 들면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 모두다 아는 얘기지만 죽을 때는 아무것도 함께하지 못한다. 살아있을 때 쌓아둔 명예도 재산도 모두 헛것이 되는 거다. 그런데도 움켜쥐려고 발버둥을 친다.
나이 든 것과 늙은 것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 늙는다는 것은 육체의 쇠락이다. 그렇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마음이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의미 아닐까? 영혼의 풍요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육체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부드러워지고 가벼워지고, 놓을 줄 아는 것을 아는 겸손함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이루려는 삶으로부터 담담해지는 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온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으며 냉혹하고 혹독한 추위를 견디면서 더 당당해지고 강인 해지고 더 풍요로워지는 나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들림없이 의연하라는 세월의 훈장 아닐까.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터득한 것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성취했는가가 아니라 크든 작든 삶의 과정에서 달려드는 고통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그 선택의 열매다. 그 선택의 열매가 단단하다거나 아프다거나 고통일지라도, 그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열매를 만드는 거다.
사람들은 죽음을 얘기하면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몸짓은 마치 죽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몸부림 같기도 하다. 그들은 죽음 얘기 말고 멈추지 않은 에너지 사랑 열정을 말하라고 한다. 살아갈 날이 찬란한 사람들에게 해지는 늙은 ‘꼰대’이야기 말고, 해뜨는 ‘청춘’이야기를 하라고 한다. 나는 흩어지는 나뭇잎 같은 덧없는 열정과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노을 같은 허무한 청춘보다, 터무니없는 욕심을 줄이고 놓음을 사랑할 줄 아는 행복과 평안을 말하고 싶다.
죽음은 분명 터부시되는 주제다. 죽음 문화에 대한 성숙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음이야기를 쓰고 싶다. 죽음이 두렵지 않거나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에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죽음을 공포로 만든다고 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인생의 행복도’는 떨어진다고 했다. 내가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죽음은 당연히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몇 차례 수술을 받았다. 청년시절에 교통사고로 무릎이 깨져 전신마취를 당하고 10여시간의 수술을 받았다. 30대 초반에는 싸움을 하다 턱이 깨져 역시 전신마취로 4시간여의 수술을 받았다. 나이 먹고서는 탈장 수술을 받았고, 눈 수술도 받았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의 수술도 받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한다. 복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는 수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몸뚱이 여기저기에 흠집이 생긴 거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부속품이 고장 나 수리한 값싼 중고차다.
그렇지만, 싸구려 중고차가 됐지만, 나는 누구나 체험할 수 없는 값진 죽음의 체험을 했다. 비록 인위적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죽음이었다. 내 몸뚱이를 칼로 찢고 망치로 뼈를 깨어내도 나는 아무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내 육신은 조용했다.
내가 전신마취를 당하고 수술에서 깨어나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짙게 그리고 깊게 다가온 죽음의 실체였다. 죽음이란 전신마취 당한 것처럼 아픔이나 슬픔이나 그리움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없음 (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살만큼 살아서일까. 나는 죽음을 편하게 말하고 싶다. ‘죽음은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을 가진 개체들의 필요한 과정’이라는 흰소리 때문이 아니다.
내가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생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마지막이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말하는 거다. 나는 죽음의 이야기에서 삶을 말하려 한다. 죽음도 삶의 일부분이다. 덧붙이지 않고 치장하지 않은 삶의 마무리가 죽음이라는 걸 말하는 거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잠자다가 그대로 눈을 감을 수도 있고 언제나처럼 눈을 뜰 수도 있다. ‘헤르만 헤세’는 죽음을 ‘잠자리에 들 때’라 했다. 그렇다. 나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내가 얘기하는 죽음은 살아가는 과정이다.
마무리하기 전에 계획할 시간이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끝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 끝을 받아들일 준비가 조용하고 편안하게 되어있고 싶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