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말할 수 없었던 제주역사의 가장 큰 상처…

4.3 항쟁은 제주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누구도 말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4.19 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된서리를 맞았다.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4.3 항쟁에 관한 글은 판금 되거나 필화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정권은 4.3 항쟁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했다. <구성/정리 허지은 기자>

  

01_언론의 오랜 침묵 속 ‘폭도의 자식’ 소리까지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연좌제 사슬에 묶여 장래가 막혔다.

깡그리 불태워져 잿더미가 된 마을로 돌아온 후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맨손으로 척박한 땅을 일구며 몸부림쳤다.

국민들은 고립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가르쳤고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보자.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어둠을 가르는 한 발의 총성은 순식간에 제주도를 흔들어 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붉은 봉화가 오르고 이상한 공기가 제주도 전체에 감돌았다.

탕! 하는 총성은 5.10 망국선거를 실력으로 저지하기 위한 전 무장세력에 대한 공격개시의 신호임과 동시에 제주도민 전체의 궐기를 촉구하는 호소였다. 그것은 또 폭력에 의해 단독정권을 수립하려는 자들에 대한 일대 철퇴이며 제주 민중의 대대적인 궐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1.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2. 망국 단독선거 절대반대. 3. 투옥 중인 애국자를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4.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즉각 돌아가라. 5.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6.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 7. 한국통일 독립 만세.

 

이러한 슬로건과 함께 300여 명의 무장, 비무장대원들은 각지의 산봉우리부터 일제히 올려진 봉화와 총성에 동서남북으로 호응해 봉기의 포문을 열었다. 은밀하게 산에서 내려온 여러 무장대는 전격적인 공격을 가해 순식간에 제주도 전체를 완전히 제압했다.

 

02_“휘발유 부어 30만 제주도민 모두 학살하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 정상과 그 일대 주요 오름에서 일제히 타오른 봉홧불을 신호로 무장한 세력들이 경찰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과 지역유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당시 제주도 경찰관서 20곳 중 14곳이 불에 탔다.

이 사건을 접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제주 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라고 했고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 (道)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그보다 한술 더 떠서 “제주도의 3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곧바로 미 군정과 국방경비대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됐다. 제주도 전역에서 초토화작전과 대량학살이 이뤄졌다. 유격대는 1949년 초 신년 대공세를 펼쳤지만 토벌군의 압도적인 우세와 지리적인 고립 그리고 병력 보충과 보급품 조달이 중단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야기됐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됐다.

4.3 항쟁으로 제주도는 쑥대밭이 됐다. 희생된 사람이 8만 8000명에 이르렀고 1만 5000호가 불에 태워졌다. 7만 8000두의 소와 2만 2000필의 말 및 2만 9000마리의 돼지가 도살됐다. 곡류 13만 5000석, 고구마 420만관, 면화 9만 9000관, 소채 90만 관이 소각됐다.

 

03_밤에는 공비, 낮에는 토벌대에 괴롭힘 당해

당시 제주도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에는 마을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토벌대와 경찰들이 찾아와 도피자를 수색했다. 결국 마을의 남자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4.3 항쟁으로 제주도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인명피해는 2만 5000명-3만 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퍼센트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 9285동이 소각됐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 (2011년 기준), 희생자 1만 4032명, 유족 3만 1255명이 결정됐다. 4.3 항쟁은 지금도 제주 사람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4.3 항쟁 이후 제주의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 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술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것들은 이 골목 저 골목 흔해진 죽은 돼지 오줌통을 가져다가 오줌 지린내를 참으며 보릿짚대로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넣어 축구공 삼아 신나게 차고 놀곤 했다. 우리는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성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줬을까?”

1949년 4월에 대대적으로 벌인 토벌작전으로 공비의 우두머리인 이덕구가 사살됐고 주요 근거지는 점령당했다. 토벌대들이 그들의 무기를 빼앗으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산으로 숨어든 그들은 5년이 지난 1954년까지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9월 21일에야 20명쯤으로 줄어들어 저항능력을 상실하면서 4.3 항쟁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저항자가 마지막으로 잡힌 것은 1957년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아 가끔 들쑤시고 일어나는 것이 4.3 항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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