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룡유감

잠룡 (潛龍)… 사전에서는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물속에 숨어있는 용’ 또는 ‘왕위를 잠시 피해있는 임금이나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하고 묻혀있는 영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풀이돼 있습니다. 요즘에는 ‘대선출마를 선언하지 않았거나 대선출마의 가능성이 있는 자를 아직 승천하지 않고 잠수 중인 용에 빗대어 한 말’로 해석하고 있기도 합니다.

차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한국에는 지금 여야 모두를 합치면 스무 명도 넘는 이른바 잠룡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미안한(?) 이야기를 하자면, 신문 방송 등 매체에서 그들을 일컫는 잠룡이라는 표현이 왠지 저한테는 ‘잡놈’으로 들릴 때가 훨씬 많습니다.

말로는 하나 같이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생각한다지만 그들은 어찌 보면 대통령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대통령병 환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생각한다면 실천 가능한 정책대결을 펼쳐야 할 텐데도 틈만 나면 서로의 과거와 약점을 물고 뜯고 아주 난리도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은 고사하고 머리에 든 것도 없이 헛소리나 찍찍 해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들여다보지도 않을 재래시장을 찾아 국밥이며 떡볶이며 순대를 먹고 상인들의 손을 잡고 흔들며 시장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열광하는 일부 사람들의 환호에 그들은 마치 대통령이 된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놈이 그 놈… 아주 오래 전부터 정치판에 대해서는 삐딱한(?) 생각을 심하게 갖고 있는 저는 그렇게 지들끼리 찧고 까불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지곤 합니다. 워낙 정치판이라는 게 패거리(?)로 움직이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사람 밑에 들어가 버젓이 참모역할을 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이건 아니라고 봐!”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럼에도 한바탕 난리들을 치고 그들 중 대통령후보가 가려지고 막판 싸움을 거쳐 내년 3월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것입니다. 누가 됐든 최소한 ‘전임자보다 나은 사람’이 진정으로 국민과 나라를 위하는 대통령이 돼야 할 텐데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건 저뿐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는 사람 중 하나가 도쿄올림픽 4강 신화를 이뤄내고 여자배구 국가대표를 은퇴한 김연경 선수입니다. 저도 최근 그 선수의 찐팬이 됐는데 김연경 선수가 2016 리우올림픽에서 배구협회의 지원이 없어 도시락에 컵라면을 먹으며 경기를 하고 통역도 본인이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 배구협회장을 지낸 사람이 지금 야권의 한 대선 예비후보를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다는 소식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김연경 선수는 ‘식빵언니’라는 애칭(?)을 갖고 있습니다. 2016 리우올림픽 일본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공격이 실패하자 자기도 모르게 ‘한국인들의 그 찰진 욕’을 혼잣말처럼 했는데 그게 중계카메라에 잡혔던 겁니다. 욕마저 밉지 않았던 김연경 선수를 향해 팬들은 그 찰진 욕을 ‘아, 식빵!’으로 승화시켰고 그녀에게 ‘식빵언니’라는 별명을 붙여준 겁니다.

이번 도쿄올림픽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아, 식빵!’이 또 한번 있었습니다. 김연경 선수가 네트싸움을 예상하고 스파이크 대신 세르비아 진영으로 살짝 공을 넘겼는데 티아나 보스코비치 선수가 이를 간파하고 잽싸게 손을 빼 실점을 당했던 겁니다. 김연경 선수 입에서 ‘아, 식빵!’이 튀어나왔고 그 소리를 들은 보스코비치 선수가 네트 아래로 손을 슬그머니 내밀어 터키에서 한 팀으로 뛴 적이 있었던 두 선수는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보스코비치 선수의 등 번호가 18번이었습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는 속담처럼 코트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김연경 선수이기에 욕마저도 승화될 수 있는 겁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열전을 펼치고 있는 대권주자들도 잡놈이 아닌 잠룡이 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지금부터라도 갖춰줬으면 좋겠습니다. ‘아, 식빵!’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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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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