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일요일 맑음

늙어지면 초저녁잠은 늘고 새벽잠이 줄어든다는데 나는 어찌된 건지 초저녁잠은 줄고 새벽잠도 줄었다. 새벽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 냉장실 같은 차고 신선한 새벽공기를 심호흡하면서 불그스레 동터오는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살아있음이 몸서리쳐지도록 황홀하다.

 

월요일 흐림

식구들끼리 가사노동을 알아서 하고 아침식사는 각자 챙겨서 혼밥을 하자고 결정한 것이 2년여 전이다. 가족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다. 수긍하지 못하면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천덕꾸러기가 될 것 같아 받아들였다. 세상이 그렇게 변한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이젠 곧잘 세탁기도 돌리고 청소기도 돌리고 밥도 앉히고 설거지도 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처음에 혼밥을 준비할 땐 주둥이가 댓 발은 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이들 수록 대접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런데도 혼자 챙겨먹노라면 아직도 가끔은 쓸쓸함이 고개를 든다. 변화한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수요일 짙은 구름

책이 페이스북을 못 이기고 철학이 블로그를 못 이기고 클래식음악이 트로트를 못 이기는 시대다. 내가 시대에 맞춰 살아야 한다. 어른이라고 존중 받는 시대도 아니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깊게 뿌리내린 세상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평온해지는 거다.

 

목요일 가끔 구름

식구들 모두 외출하고 혼자 저녁을 먹었다. 김치찌개를 데우고 소주 ‘처음처럼’ 한 병을 샀다. 이름이 맘에 든다. 처음처럼은 끝이 없는 끝을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쉽든가. 처음처럼 이라는 상표는 옥중 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쓴 신영복 교수의 붓글씨다.

독립운동가 홍범도장군을 공산주의자라며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쓰레기 같은 놈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난리다. 무식하고 정신 나간 놈들! 공부 좀 해라. 21세기에 웬 공산주의냐? 공산주의란 스탈린 사후에 깨져버린 이념이다. 홍범도장군이 흉상 세워달라고 했더냐? 니들 마음대로 흉상 세울 때는 언제고 이젠 흉상 철거한다고 요란이냐?

이놈들은 해병 병사의 죽음을 바르게 수사하겠다는 ‘정의’를 잘라내고 광태를 부린다.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예 모르고 그저 지들 수령과 일당의 권력을 위해서만 머리를 굴린다. 여야 보수 진보를 불문하고 이런 맹목적이고 극단적 사고의 영역에 매몰된 놈들이 백성들을 편갈라 싸우게 하는 원흉들이다. 놈들의 궤변과 천박함이 부끄럽다.

이런 무식한 놈들이 신영복 교수를 좌파라고 몰아붙인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쓴 글을 읽는 사람도 좌파라고 공격한다. 그렇다면 그가 쓴 글을 읽고 그가 쓴 상표 처음처럼 소주를 마시는 나도 좌파인가?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금요일 바람 세게 불다

거센 바람소리에 새벽잠에서 깨었다. 왠지 새벽바람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어린 시절 신문배달 하던 새벽이 떠올라 뒤척거린다. 마음이 뒤숭숭해서 인지 온종일 바람이 거칠다. 이럴 땐 술 한잔이 명약이다. 혼자 앉아 홀짝거리며 마시는 모양새가 그다지 곱지는 않다지만, 나는 그런 자리가 평온하다.

“술 잘 마시는 건 지 아부지를 빼다 박았다”며 빙그레 웃음짓던 살아생전 어머니가 술만 마시면 찾아온다. 이만큼 나이 먹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여전히 마신다. 마음 병인가? 외로움인가? 결국 인생은 혼자인 거다. 내가 나를 아끼고 위하고 사랑해야 한다.

 

일요일 가랑비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지는지 모르겠다. 작은아들 같은 조카의 갓 태어난 셋째 ‘아율’이 동영상을 보면 꼼지락거리는 생명의 감사함에 울컥하며 눈물이 흔들린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면 가슴이 저린다. 높고 파란 하늘, 비 내리는 들녘, 바람에 나뒹구는 나뭇잎, 이런 것들에도 눈물이 고인다. 노래를 들어도 눈물이 스며든다. 청춘, 내 사람이여… 세상과의 이별 연습인가?

 

화요일 구름 듬성듬성

윤기 나는 새 자전거를 샀다. 헬멧이랑 장갑도 샀다. 기분이 너무 좋아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부턴 자전거 타고 다닐 거다. 음주운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잔 걸치고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는 순간 자전거가 옆으로 푹 꼬꾸라졌다. 깜짝 놀라 깨었다. 오수 (午睡)에 찾아온 단꿈이었다.

 

토요일 햇살 밝음

미국에 사는 큰형님이 요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이다. 언젠가는 우리 서로 영원히 헤어져야 함을 알지만 서글프다. 죽음은 어느 세월 어느 길에 선가 마주치게 되는 친구다. 그를 맞아 어깨를 걸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도록 미리 봇짐을 꾸려둬야겠다.

쌓아두지 말고 아끼지 말고 버릴 것들을 정리하자. 그래야 잠자리도 꿈속도 맑고 가벼울 터다. 끝이 보인다는 것은 편안해진다는 거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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