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하루

“대수술이었어요. 앞으로 일주일 관리가 아주 중요해요. 수술부위에 붙여둔 밴드가 떨어지면 안되니까 당분간 걷지 않게 하세요. 일주일 동안 산책은 삼가고 오늘 밤은 따뜻한 실내에 있게 하세요. 항생제와 진통제는 아침 저녁으로 먹이고 소변을 잘 보나 관찰하세요.”

 

하얀 타월에 덮인 미키가 힘없는 눈동자로 수의사 품에 안겨 긴장감으로 불편하게 앉아 있는 나를 위로하듯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주 낯익은 듯 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미키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자 시간여행을 잠깐 하고 있었던 의식 속에 어렴풋한 등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한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면서 병원에 데리고 다녔던 시간들과 함께….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이 딸린 세탁장에 새로 사온 쿠션을 깔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애완동물용 패드도 옆에 깔아 놓고 목에 끼운 칼라가 빠지지 않게 확인하면서 하룻밤을 실내에서 보낼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신경 썼다. 쓰다듬어 주는 나의 손길을 느끼며 정성스레 만들어준 그의 보금자리를 파고든다. 편안했는지 금방이라도 잠이 들것 같아 보인다.

 

어느덧 십여 년이 넘는 시간을 미키와 같이 보내고 있다. 이제는 나이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고 어린 강아지 때처럼 에너지도 충만하지 않다. 걷는 것도 예전 같지 않고 산책을 할 때면 쉽게 숨이 차는 듯 보인다. 미키가 팔팔했을 땐 동네 주위가 너무도 작게 느껴져 이웃 동네까지 휘젓고 돌아왔는데 이젠 산책 반경이 점점 좁아져 가고 있다. 그래도 그는 항상 우리에게 처음 왔을 때처럼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도 둘도 없는 애완견으로서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미키만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니다. 이제 나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얼마 전엔 어지럼증으로 응급실에 찾아가 종합검사를 받고 왔다. 뇌 CT스캔까지 하고도 뚜렷한 원인을 발견하지 못해 내린 결론은 스트레스와 나이 들어 가면서 한번쯤 경험하는 이석증이라 했다.

 

일년 넘게 아팠던 어깨가 조금 좋아지니 또 예기치 않았던 다른 상황이 날 기다리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혈압수치가 높아 약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의사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평소에 음식을 짜게 먹지도 않았고 운동도 매일 하고 있으며 평소에 잠도 충분히 잘 자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름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한 나의 인생에 배신감을 확 느낀 순간이었다.

 

우리의 마음과 몸 건강이 연결되어 있듯이 예전 같지 않은 컨디션이 내 정신력까지 지배하려 들고 있다.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과거에는 거뜬하게 견뎌낼 수 있었던 직장생활의 스트레스가 자꾸만 버겁게 느껴져 간다. 나와 맞지 않는 동료나, 선생님 말을 우습게 여기는 학생들을 이젠 그만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밀려온다.

 

이곳을 홀연히 또 떠날 때가 온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나이 들어 가면서 인생에 이런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나는 왜 알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상황을 조금 더 잘 소화할 수 있었을까? 정말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매뉴얼 없이 맞닥뜨리는 무모한 도전의 연속이다.

 

미키처럼 예전 같지 않은 나의 몸을 붙잡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 그래도 지금부터 겁먹지 말자.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세상엔 참으로 많지 않았던가. 아무리 작아도 단단한 희망을 붙잡고 영원과 하루가 나란한 이 길을 오늘도 또 내딛는다. 어제보다 좀 더 나아진 미키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진다.

 

조급함과 분주함이 나를 재촉할 때면

천 년의 나무에 기대 앉는다

천 년의 경전을 읽어 나간다

긴 호흡으로 다시 나의 길을 나선다

 

박노해 시인의 글이 저 구렁텅이 속에 빠져 헤매고 있는 나를 나지막이 위로한다.

 

 

글 / 송정아

 

 

 

 

Previous article청춘의 덫
Next article교민동정 (2023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