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이틀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막걸리 마시러 갔다.

고국 떠난 후 형님과 세 번째 만났다. 다시 만난 것이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닌데도, 형님은 세월의 오염수를 마신 것 같았다.

세월은 형님의 얼굴에 자글거린 잔주름을 많이도 새겨놓았다. 종아리는 가늘어졌고 팔뚝에는 근육이 사라졌다. 어떻게 이렇게 되냐고 나도 이렇게 가야 하냐는 나의 눈물 섞인 푸념에 형님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서산에 해지는가? 인생이 꿈인가?

먼먼 그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었지만 가을 바람은 낙엽을 휘몰면서 내 등을 떠밀었다. 형님이 속삭이듯 말했었다. 그 길이 너가 가야 할 너의 길이라고.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그렇게 헤어져 서로 다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날마다 형님 만날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잠들었다. 고국 떠나 20년 세월이 흐른 후 만났을 때 형님의 젊음도 나의 젊음도 세월에 물들어 퇴색돼 있었다. 검은 머리 희끗희끗해지고 윤기 흐르던 피부는 버석거렸다. 하지만 마음은 처음 헤어지던 때 그대로 있었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을 아파하며 다시 만날 수 없을 듯 헤어지고 삭지 않는 그리움에 뒤척이는 밤들은 많은 세월에 줄을 이었다. 문득 어쩌면 형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이제는 만남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설음에 견디다 못해 배낭을 꾸렸다.

배낭에는 읽을 책들과 두 번째 만나고 이별할 때 형님이 넣어준 형님이 입던 옷, 아직까지도 내가 즐겨 입는 오래돼 소매 끝이 닳아진 긴 팔 셔츠와 색깔 바랜 반팔 셔츠가 전부였다.

고국에 도착하자 형님은 그때처럼 그 자리에 서서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포옹했다.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지만 내 형님은 천 년이 가도 변함없는 기다림과 반가움과 사랑을 담고 서있었다.

피붙이들을 모두 불러모은 만남의 만찬에는 통화만 되면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걱정하는 형님이 소주와 막걸리를 넉넉하게 쌓아놓았다. 이것도 세월이 전해주는 귀띔인가? “당신 아우도 서산 마루에 걸려있는 낙조야. 그렇게 마실 날도 그리 많지 않아. 마실 수 있을 때 마시게 그냥 냅 둬!”

선산에 성묘 갔다. 우거진 잡풀을 헤치고 더듬어 오르는 등성이에 내 가슴에 서러운 한으로 남아있는 얼굴도 몸짓도 기억할 수 없는 내 아버지의 자리와, 생각만 떠오르면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만드는 내 어머니의 자리가 여전히 그렇게 그대로였다. 내가 타국에서 눈을 감아도 그렇게 그대로 일거라는 생각에 허무가 밀려왔다. 그 허무를 막걸리 한 사발에 눈물을 섞어 마셨다.

형님이랑 심학산에 올랐다. 심학산은 3층 형님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높이 192미터로 야트막하다. 형님과 나는 팔을 걸고 아주 천천히 심학산을 오르면서 형님이 사는 이야기 내가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는 피붙이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인가 보다.

심학산 정상에서 저 멀리 눈 아래로 민족의 핏줄기 한강이 흐르는 듯 마는 듯 잠잠했고 임진강이 함께 가자고 한강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한강과 임진강은 품을 포개 재두루미 도래지를 풍성하게 벌리고 생태 습지를 이뤘다. 하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통일전망대는 차라리 쩍쩍 갈라진 메마름 이었다.

햇살이 밝은 날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 책 속에 둘러싸여 차를 마시며 나는 형님에게 세상 살아가는 것들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쌓아놓은 절망과 미움의 벽을 토로했다. 형님이 그랬다. “너 스스로 절망과 미움의 벽을 만들지 말아라.”

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내일 모레가 여든인데 아직도 정정하게 점포를 운영하는 셋째 형님께 작별인사를 갔다. 셋째 형님은 맛이 일품이라는 ‘36년 전통의 칼국수’와 장수막걸리를 사줬다.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나를 보면서 셋째 형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마시는 데는 도가 텄구나!”

여든이 가까운 나를 여전히 막둥이라 부르는 셋째 형님이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막둥아, 100만원이다. 얼마 안 된다. 받아가라. 많이 못 줘서 미안하다.” “뭡니까? 제가 형님을 돕지 못해 송구한데 이걸 어떻게 받습니까? 절대로 못 받습니다.”

좁은 칼국수집에서 받으라느니 못 받겠다느니 옥신각신했다. 옆자리 손님들이 구경꾼이 됐다. 셋째 형님은 내 강경한 고집을 못 꺾었다. 칼국수집 손님들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고이는 눈물 때문에 한동안 곤혹스러웠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내 형님들의 끝없는 사랑에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굴렀다.

그렇게 열 이틀이 훌쩍 갔다. 형님께 큰절 올리고 떠나온 그 열 이틀에서 나는 마음속에 고요한 평화를 심었다. 영원히 그대로이고 싶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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