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야 하나

큰손녀가 책을 사다 줬다. C.S.루이스가 저술한 <순전한 기독교 / Mere Christianity>다.

나는 책을 사다 준 이유를 물었다. 큰손녀는 “제가 읽어보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한글판으로 주문했어요”라며 미소를 띄웠다.

큰손녀는 칼리지를 졸업하고 파머스톤노스 (Palmerston North) 소재 메시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해 5년과정을 단 한번의 유급도 없이 마쳤다. 스물세 살의 젊은 수의사가 돼 지금은 오클랜드 동물병원에서 동물들과 함께 삶과 죽음을 나누고 있다.

내 눈에는 한없이 여린 아이가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외롭게 자신과 싸우면서 닦아낸 자랑스럽고 빛나는 자신의 길이다. 큰손녀는 대학시절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시위를 주도해 현지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 후 알았지만 교회 문턱에도 안 가봤던 큰손녀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버티면서 힘들 때마다 교회를 찾아서 기도하고 봉사했다. 기독교라면 거부감으로 생성된 내게는 경이한 모습이었다.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기독교신앙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변론했다. 기독교신앙의 핵심을 변증서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었다. 변증서 관점에서 주장한다는 것은 강요가 아니므로 이성으로 접근해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길 바란다는 의미다.

내용은 어려웠다. 철학서적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개념들에 대해 직관이나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내용을 전개했다.

나는 교회를 싫어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잘못된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다. 그들의 교만과 지성인인 체, 지식인인 체, 순수한 척, 고결한 척하는 가식이 싫었다.

내가 교회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생 때다. 성탄절 날 작은 형이 오늘 교회가면 캐러멜을 준다고 했다. 형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동네교회에 갔다. 캐러멜 나눠주는 형이 교회마루바닥에 앉아있는 나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너 오늘 처음 나왔지?” 나는 그를 올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무릎위로 캐러멜을 툭 던지면서 말했다. “이거 먹고 이제부턴 잘 나와. 알았지?” 어린 마음에도 너무 창피했다. 너무나 생생해 지워지지 않는 교회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다.

영산포에 사는 의사 삼촌은 개인병원을 운영했다. 숙모는 종교에 빠져들어 피아노를 포함해 값진 집안 물건들을 교회에 갖다 바쳤다. 삼촌은 반대했다. 급기야는 부부가 식사를 따로 하는 극심한 가정불화가 이어졌다. 삼촌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때 내 어머니가 했던 혼잣말이 내 귓속에 남아있다. “예수쟁이가 서방을 잡아먹었구나!”

신문배달 할 때, 일부러 떼먹었는지 잊었는지 모르지만 신문 구독료를 주지 않고 이사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구독료는 고스란히 내 수입에서 빠져나갔다. 그들이 살던 집 대문에는 양철로 만든 ‘무슨 교회’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경우가 흔했다. 나는 그 양철명패에 퉤! 하고 침을 뱉곤 했다. 그건 잘못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나의 멸시였을 거다. 나는 고국에 살면서 성탄절 캐러멜 이후 교회를 찾아본 적이 없다.

뉴질랜드 이민 와서 기독교에 대한 어린 시절의 어둡고 서글픈 기억들 위에 새로운 색칠을 하고 싶어 영어설교를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키위교회에 가봤다. 한인성당, 한인교회에도 가봤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나름대로 아픈 상처를 치유해보려고 애써봤지만 그런 일들과 겹쳐진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행태는 해파리처럼 엉겨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큰손녀는 이유는 모르지만 내가 종교,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안다. 그러면서 권해준 책 이였다. 나는 냉정하고 신중하게 읽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이 실제로 고민해야 하는 주제를 도덕률, 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 실천적 행동, 용서, 사랑, 소망, 믿음, 교만으로 정의했다. 나는 공감한다.

책을 읽게 해준 큰손녀에게 예의를 표하고 싶었다. 해서 큰손녀가 기도하고 봉사하는 Life Church에 가봤다. 목회자의 영어설교는 대형화면 아래 자막으로 표시되어 설교주제는 대충 알 수 있었지만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다. 찬양내용도 그랬다. 그렇지만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와 겸손이 넘쳐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나를 평온케 했다. 그런데 뭔지 모를 울음이 울컥 치솟았다.

나는 내 방황하는 텅 빈 영혼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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