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것

시 (詩)를 읽을 때마다 어떤 분야의 글이든 글은 시처럼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형이상학적인 말장난이 아니며, 미사여구를 꿰맞추는 공허한 글 장난도 아니다. 시는 실존하는 삶의 철학이 해탈로 승화되어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밝음과 어둠과 기쁨과 슬픔의 소리라는 느낌을 짙게 한다. 내 생각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 /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 꿈틀거리다가 /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 버둥거리다가 / 어찌할 수 없어서 /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 한때의 어스름을 /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스며드는 것’ 안도현

이 시를 읽으면서 간장게장이 되어가는 엄마의 몸부림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어두운 세상과 방황하는 삶을 영상처럼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렸다. 간장에 몸이 잠기고 고통이 다가올 것을 안 엄마 게는 온몸으로 아이들을 덮으면서 아이들에게 고통을 잠으로 얘기했다. 그때 엄마 게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이것이 시인의 눈이며 가슴이다. 시인의 눈은 가슴 깊은 곳에 있다. 무지렁이인 나는 이 시를 읽기 전까지는 간장게장을 수없이 눈앞에서 보았음에도 시인의 이런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한숨이었을까? 이 시를 읽은 후부터 나는 간장게장에는 손도 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길조차 주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스며드는 것’을 읽으면서 내 어머니와 시인이었던 내 누이의 서럽고 아픈 얘기가 겹쳐졌다. 지나간 세상 어느 날에, 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스무 살 된 내 누이는 홀어머니와 어린 네 동생들을 지키려고 ‘인민군나라’의 요구대로 흰 저고리 왼쪽 팔뚝에 ‘여맹위원장’이라 쓰여진 붉은 완장을 둘렀다.

돌아온 ‘국군나라’는 비록 주민들에게 해코지한 것은 없지만 여맹위원장이라는 완장을 두른 것만으로도 인민군나라에 부역한 것이라며 누이를 체포하려 했다. 내 어머니는 누이를 끌고 희뿌연 초승달 칙칙한 어둠 속을 더듬으며 산속으로 숨어 다녔다.

어머니는 쏟아지는 어둠의 간장을 웅크린 등으로 막아내며 엄마 게처럼 누이를 온몸으로 덮었으리라. 어머니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서러웠을까.

세상 살아가노라면 아픔, 슬픔, 어둠, 고통이라고 일컬어지는 간장이라는 것들이 끊임없이 스며든다. 시는 사람들 영혼 속에 스며들어 삶이라는 실체를 다독여주는 거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그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란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그것으로써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며 시의 본질을 알았다고 말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시의 정의나 그 해명은 어떤 개인의 독자적인 시관 (詩觀)에 불과할 뿐이며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것은 아니다. 시는 함축된 의미를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의 표현’이다. 시는 결코 손끝 재주에 의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인생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더욱 추구해서 진리 및 진실을 밝혀줌으로써 생의 감동과 감화를 전하는 언어예술이다.” –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평론

평론에 대한 논쟁을 떠나서 나는 시련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나갈 힘과 희망을 말하여 삶의 존재가치가 스며들게 하는 시를 가슴에 새긴다. 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담은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 곽재구 시인의 ‘새벽편지’와 ‘사평역에서’ 같은 시를 아낀다.

시는 바름 진리 외로움 고통 통곡이다. 비단 시만이 아니다. 모든 글이 그러할 거다. 아시아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은 “글은 언어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실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글은 찢어져 상처 난 것들을 꿰매주고 벌어진 것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쉽고 편한 인생보다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글이라는 것에는 바름 희망 감동 따스함을 이어주는 영혼이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는 한강의 순수한 고백인 것이다.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칼럼이든, 어떤 형식이든 글이라는 껍질을 둘러쓴다면 글 쓰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몸 떨리는 암시 같기도 하다.

더불어 글은 눈과 가슴으로 써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에둘러 깨우쳐주는 한강의 잔잔한 목소리라는 생각에 내 얼굴이 가슴이 화끈거렸다.

글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들의 힘에 기대어 눈감고 귀 막고 입 닫고 비루한 아부나 늘어놓는다면 그런 글을 어떻게 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랑과 진실이 스며들지 않은 글은 글에 대한 존경심이나 인간 내면의 변화와 성찰에 대한 목마름을 상실한 언어유희에 불과한 거다.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에 고민하지 못하고 ‘어떻게 쓸 것인가’에 허둥대고 있지나 않은지, 무의식 중에 언어유희에 젖어있는 것은 아닌지, 반칙과 특권, 약육강식, 삶의 가치, 감동과 감화, 꿈과 희망, 옳음과 그름에 눈감고 감성적인 목소리에만 취해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내가 끄적거리는 ‘글’이라는 것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고 스며드는 느낌이라도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그럴 수 있다면, 더 오래 살아, 더 많이 쿨럭이면서, 더 많은 톱밥을 삶의 난로 속에 부어 넣고 싶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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