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하고는…

머리털을 전부 깎는 것을 삭발 (削髮)이라고 한다. 중세에는 삭발이 성직자와 세속인을 구별하는 기준이었으며, 사제가 세속적인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부 종교에서는 더 높고, 더 헌신적인 종교적 삶을 시작하는 의식으로서 머리를 밀어버리는 삭발을 행한다. 삭발식은 성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가르침을 받다가 성직에 적합하다고 결정된 남자들에 한해서 엄격한 명령에 따라 행해진 의식이다.”

불교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승려로 입문하는 의식을 치를 때 삭발을 하며, 그 후에 자격을 제대로 갖춘 승려가 될 때 다시 삭발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불교의 출가수행자가 머리를 깎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거다. 하나는 다른 종교의 출가수행자와 모습을 다르게 하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세속적 번뇌를 단절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삭발에는 숭고하고 존엄한 의미가 담겨있다.

근자에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여야 4당의 합의아래 선거법과 공수처법이 패스트트랙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었다. 이 법을 반대했던 제1보수야당이 극렬하게 반발하며,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해 의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시민들로부터 ‘동물국회’라는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제1보수야당은 개의치 않고 패스트트랙 통과에 대한 항의표시로 장외투쟁을 선포했다. 먼저 그들의 절박성을 알리겠다며 집단 삭발식을 거행했다. 소속당원들에게 삭발식 참여를 독려했다. 심지어 여성 의원들에게도 삭발식 참여를 권유했다. 하지만 정작 삭발을 자청한 당원은 현역 국회의원 4명과 충남도 당위원장 등 5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국회본관 앞에서 삭발에 앞서 “불법과 야합으로 선거법, 공수처법 등을 패스트트랙에 태운 의회민주주의 폭거에 삭발 투쟁으로 항의하고자 한다”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뒤에 서있던 30여명의 당원들이 처절한 표정으로 애국가를 제창했다. 이어 5명은 삭발의 숭엄한 의미도 모른 채, 삭발식을 거행했다. 햇빛에 번쩍이는 큰 칼도 아닌, 머리 깎는 전기기계로 쓱쓱 밀었다. 머리를 밀리면서 일부는 입술을 앙다물며 울음을 참았다. 세속적 번뇌를 단절할 승려가 될 것도 아니면서 삭발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이 뭔 성직자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분위기가 자못 비장했다. 마치 나라를 잃어버린 우국열사들이 독립투쟁 하겠다고 출가하는 현장 같았다. 저만치 흘러가버린 구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시대에 한참 뒤쳐진 정치개그 한마당이었다. 터지는 쓴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저급한 행태는 찌질함에 측은함까지 느껴졌다.

시민들은 이 삭발식에 대해 반응했다. ‘머리는 깎으면 또 나는 것 아닌가?’ ‘아저씨라는 영화 코스프레 하나?’ ‘여성의원은 왜 빠졌나?’ ‘코미디를 해라’ 등등 빈정거림 투성이였다.

같은 날, 당 최고위원들은 장외투쟁의 한 방안으로 전국 순회를 하기에 앞서 청와대 앞에서 최고위원회를 열었다. 청와대 앞 도로에 책상을 늘어놓고 나란히 앉은 당대표와 원내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들은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휘두르면서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를 본 한 시민이 “쌩쑈를 해라”라고 소리쳤다. 또 다른 시민은 “독재했던 수구꼴통들이 독재타도라는 게 말이나 되냐”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렇듯, 제1보수야당 자유한국당의 절박성은 아쉽게도 시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쌩쑈’로 평가절하되고 말았다.

이런 행동들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던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자유한국당해산’을 촉구하는 청원이 올라왔고 단 며칠 만에 180여만명이 동조를 했다. 이 숫자는 지금까지 청와대청원게시판의 기록이라는 거다.

테러, 분신, 할복, 혈서, 단식, 삭발 등등은 개인이나 집단의 의사를 표출하는 방법들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방법은 시대부적응자의 뒤떨어진 표현방법이다. 낡은 프레임과 낡은 이분법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시민들의 수준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가늠하지 못할 만큼 높아져있다. 시민들은 끝없이 논쟁하고 토론하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정치를 원한다. 자기들 맘대로 안 된다고 삭발이나 하고 애국가나 부르면서 징징대는 코미디정치에 박수치는 시민들은 이제 없다. 제발 수준 좀 높여라!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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