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小確幸

즐겁고 고맙고 행복한 일이 가득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매년 추석 때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회자되곤 하지만 저에게는 요즘이 그런 날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뽐이, 예쁜 짓!’ 하면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한쪽 뺨을 꾹 찌르고는 고개를 까딱 해줍니다. “뽐이, 사랑해요!”에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찰싹 붙입니다. 아직 하트를 그리기에는 역부족인 겁니다. “뽐이, 윙크!” 하면 여지없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립니다.

이제 14개월에 접어든 봄이, 에밀리가 요즘 예쁜 짓을 부쩍 합니다. 아직은 소파나 벽을 잡고 걷지만 곧 이곳 저곳을 쌩쌩 달릴 겁니다. 예쁜 짓, 사랑해요, 윙크 외에도 ‘아, 예쁘다!’ 하면 쓰담쓰담 할 줄도 알고 ‘만세!’ 소리에는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립니다.

태어나서 몇 달 동안은 명색이 할머니 할아버지인 우리를 보고도 사정없이 울어대서 살짝 밉기까지(?) 했지만 요즘의 에밀리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만 보면 반가움에 두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쏟아냅니다.

우리 집 여기저기를 신나게 휘젓고 다니던 녀석은 지 엄마 아빠가 밖으로 나가려 해도 아무런 동요 없이 신나게 빠이빠이를 합니다. 지 오빠 에이든이 하던 짓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화요일 저녁… 설날이자 제 생일이기도 해서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어머니와 단둘뿐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어느덧 일곱 명이 된 우리 가족은 이미 충분히 대가족입니다. 목표로(?) 했던 열 명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게 항상 아쉬움으로 남지만….

네 시간 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모두들 밖으로 나갔지만 에밀리는 여전히 할머니 품에 안겨 엄마 아빠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서 에이든만 정신이 없습니다. 엄마 아빠 따라 집에도 가야겠고 동생도 챙겨야겠고….

“에이든! 뽐이는 오늘 할매 할배랑 잘 건데 넌 집에 갈 거야?” 이러한 제 얘기에 녀석이 얼른 우리 쪽으로 달려옵니다. 그러다가 다시 엄마 아빠 쪽으로 갔다가… 우왕좌왕입니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모두모두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자는 게 녀석이 원하는 최상의 그림일 터입니다.

녀석들이 탄 차가 큰길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는 아내와 저의 얼굴에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가득합니다. 그날 설날 겸 생일차림에는 소주대신 스카치위스키 한 병이 올라왔습니다. 코리아타운을 만드는 좋은 사람들이 술 좋아하는 사장한테 생일선물로 안겨준…. 역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아내와 둘이서 제 생일기념 2박 3일 저비스베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도 큰돈 들이지 않고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여행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아주 편안하게 즐겼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좋아하는 낚시도 실컷 하고… 게다가 어딜 가나 물고기가 잘 안 나오는 요즘 상황에서 아내가 잡아 올린 패럿피시 (Parrotfish)…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할 물고기 중 하나’라고 꼽는다는 아주 귀한 물고기가 우리의 ‘작지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크기를 더해줬습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0년 수필집 <랑게르 한스섬에서의 오후>에서 이 같은 일들을 소확행 (小確幸) ‘작지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 정의했습니다. 얼마 전 시드니에 사는 40대 주부가 1억 700만불이라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됐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부럽긴 했지만 저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이 훨씬 더 편안하고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

 

김태선 tonyau777@hot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Previous article실질적인 은퇴계획 짜기
Next article벽도 눕히면 다리가 된다